할말이 없으면 침묵을 배워라|

 

 

할말이 없으면 침묵을 배워라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는 것은

태양을 양쪽에서 쪼이는 것과 같다.
서로의 따스한 볕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성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태양이 되자.
그리하여 영원히 마주보며 비추어 주자. 


그대의 운명을 사랑하라.
어떤 운명이든지 간에

항상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쪽 얼굴은 어둡고 우울하며

다른 한쪽 얼굴은 따뜻하고 밝다.
어두운 얼굴을 가리고 밝은 얼굴을 택하여

그것만을 눈 여겨서 바라보라.
그것이 험한 운명의 바다를 노 저어 가는 항해술이다. 
 
현명한 사람이 되려거든 사리에 맞게 묻고,
조심스럽게 듣고, 침착하게 대답하라.
그리고 더 할 말이 없으면 침묵하기를 배워라.

 
사랑한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 순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만으로 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마음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아픔과
어둠까지도 껴안을 수 있는

넉넉함을 간직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풍요하지 않게, 다복하지 않게 태어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일어난 일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에 있다.

물 위에 글을 쓸 수는 없다.
물 속에서는 조각도 할 수 없다.
물의 본성은 흐르는 것이다.
우리의 성난 감정은 바로 이 물처럼 다루어야 한다.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이 시작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으며 사랑에 대한 순수한 기쁨만으로 충만해 있다.
사랑의 첫째 조건은 그 마음의 순결함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견딘 시련들이야 말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승리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영광의 월계관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물다.
종종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힘은 경험과 역경을 통해서 자라난다.

 

 

 

 

 온 세상이 통곡과 슬픔으로 가슴이 아파서 언제 꽃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를 잔인한 4월을 보내고 있는데....어제는 종일 천안함인양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면서, 조국의 부름에 기꺼이 달려간 젊고 늠늠한 잘생긴 우리아들, 남편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그 가족의 슬픔이 남의 일 같지를 않아서 하루 내내 눈물이 글썽이고 사연 하나 하나 목이 메여옴을 온 국민이 다 느꼈을 것이다.

 

철저한 원인규명을 하여서 다시는 이런 아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부관계자는 샅샅이 밝혀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외부의 어뢰습격으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천인공노할 그 상대자는 마땅히 국제사회의 규탄과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고귀한 희생에 합당하는 보상도 치루어야 할 것이라고...우리 국민은 분개하여 지켜 볼 것이다.

내가 오늘 되로 준 그 고통이나 아픔이 말로 되어서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을 그들은 왜 모르는가.... 

세상사 모든 것이 인과응보인것을....

 

중국에서도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희생자와 실종자가 생기고 멀리 아이슬란드에서는 화산이 폭발했다고 한다.

생노병사 피할 수 없음이 우리네 삶이지만 올해들어서 각종 사건과 지진, 화산폭발, 쓰나미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은 왜인지?

지구는,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경종을 주고 있음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반성의 시간을 가져 볼 일이다. 

 

한 주가 어떻게 지나 갔는지....벌서 또 주말이다. 희생된 모든 분들의 왕생성불을 부처님전에 서원 합니다.....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고운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신 고운 주말 보내시기를~~~*^^*~~~

 

 

 

 

감동의 글]< 읽고 또 읽으며 눈시울을 적신글!>


? 미 백악관  정책 차관보 강 영우 박사의 아내 석 은옥 씨의 고백!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 그의 뒤에는 한평생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 아내 석은옥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 “최고 엘리트였던 내가 앞 못 보는 남자와 결혼,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온 감동 인생 사연” 이제 우리 부부는 인생 육십을 넘겼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년,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그가 평생 단 한 번 걸스카우트를 방문한 그때,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느님께서 내게,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그는 맹학교 중등부 1 학년생이었고, 나는 여대생이었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학생만 힐금힐금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 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이에요”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 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남편은 수년간 방황했다.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처음 만날 때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게 아니어서 남편은 어렴풋이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빛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완전 맹인이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 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2년 정도 지나 그의 성적표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 한 살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친이 안 계신 동생이 생기니 누나로서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누나 동생으로 6년,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하고, 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주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와 만난 지 5 년째 되던 해,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미국 땅에서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 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68년 12월 22일,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 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남편에게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 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 하고 말렸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2월 26일,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맹인 아내로서 내가 겪은 고통 1972년 8월,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그 항목을 삭제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몇 년 동안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피츠버그대학교 9월 학기 개강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한미재단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맹인재활센터에서 일했고, 입덧도 심했다.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온 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싸움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보행훈련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차에 결단의 기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행훈련을 받아도 자주 다니지 않은 곳이나 생소한 지역을 갈 때는 여전히 정안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보행훈련을 받아 나에 대한 의존도가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어린 두 아들을 남에게 맡긴 채 남편의 대학원 강의실을 향해 떠날 때,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강의가 먼저였다. 맹인 아빠에게 젖먹이 아기를 맡기고 도서관에 자료 심부름을 갈 때면 혹시 불이라도 날까 불안했지만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 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다가가 한국에서 유학 온 맹인 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그네를 밀어주던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했다. 과부가 과부사정을 안다고,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그 부부는 우리에게 자기 집 3층을 내줄 테니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어린 두 자녀를 돌봐달라고 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할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집에 살면서 매일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머지않아 박사가 될 남편을 내조한다고 생각 했으며,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주관 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의 식모살이나 하는 처지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오히려 아파트에 살 때보다 더 행복했다. 우리와 처지도 같고 동년배라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둘째 아이 진영이가 생겨 더욱 감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거나 울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맹인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내외는 출세 지향적이 아닌, 성취 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을 느꼈다.

또 쾌락보다는 보람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승리감과 보람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1976년 4월 25일,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 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이란….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물론 아무나 맹인의 아내가 되어 어려운 내조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할 때도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취를 나의 성취로,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학사 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받은 박사학위가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겹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맹인이 어떻게 눈뜬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무직자인 박사 남편, 아직 어린 진석이, 갓 태어난 진영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만료된 유학생비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남편이 포스트 닥터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오도 가도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배수진을 친 남편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오히려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조건으로 바꿔주실 테니 인내하며 좀 더 기다려 봐요.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 몰두하고 직장 찾는 노력이나 계속하세요.” 지금도 남편은 당시 자신의 고통을 함께하면서 그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줄 때가 가장 고마웠다고 말한다. 하루는 나의 격려가 통했는지 남편이 면접을 다녀오더니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기적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면접을 보았지만 번번이 영주권이 없어 채용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단 학생비자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월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인디애나에 도착해 남편의 첫 출근과 함께 나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터리 클럽 회원으로 매주 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병이라도 나서 내가 누워버리면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질 텐데, 다행히도 그런 기억은 없다. 아마도 내조하는 기쁨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보람이 엔도르핀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 남편이 인디애나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던 1987년 9월,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 장님 박사 탄생’,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그때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내용인즉슨, 앞 못 보는 장님이 박사가 되었다기에 기사를 읽어보니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1983년 6월 5일은 남편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등단한 날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1만6000명의 세계 민간 지도자가 모인 단상으로 남편을 안내하는데,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극도로 긴장해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군중의 시선을 볼 수 없어서인지, 그다지 긴장하지 않고 연설했다.  그리고 남편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은 45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500명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으며, 그중 500명은 상원 인준까지 받아 이름 앞에 ‘honorable’이 붙는다. 먼 이국땅에 유학 와서 이민자로 정착한 지 사반세기 만에 남편은 ‘honorable’이라는 경칭이 붙는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가 되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부시 대통령 앞으로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 지 40년,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팀으로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 신혼부부로 미국 땅에 도착할 때 태중에 있던 진석이는 링컨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하버드대 동문이 되었다. 그리고 안과의사의 꿈을 이루어 듀크 대학병원에 근무 중이며,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를 맞았다.


작은아들 진영이는 필립스 앤도버 아카데미 출신으로 부시 대통령 부자와 동문이다. 약관 27세의 나이로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고문변호사이며, 아내 역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이민자로 미국 땅에 와서 교육자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육인명사전, 미국여성명사인명사전에 올라 역사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2003년 5월 29일, 내 생일에 아들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당신 정말 행복하겠소.” 진영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팡이가 되어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며느리들까지 본 어머니로 살아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처럼 선명한 비전으로 내 인생을 인도해 신앙 안에서 명문가를 만드는 동반자가 되어준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위에 글은 보내온 메일인데 그 주인공이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쳐 아래 글을 다시 옮겨 왔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중에 가슴이 뭉클해오면서 세상에 정말 천사같은 여인이 존재함을 알게된 것 같아서 흐뭇하면서도 한편 내조를 잘 하지못한 지난날을 반성하게도 된다.

석은옥여사님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장한 한국의 여인상으로 신사임당이래 이토록 훌륭한 여인이 또 어디 있으랴싶다. 그 엄마를 보고 훌륭히 자라준 두 아드님께도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박사가 되신 강영우박사님께도 박수를 보냅니다~~~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고운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날씨는 추워도 위에 글을 읽으신 마음만은 뜨거운 열기로 훈훈하리라 생각 합니다...맑고 향기로운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안과의사로 변호사로 훌륭하게 자란 두 아들과 함께한 강영우 박사
실제로 강 박사는 198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로터리 세계대회에서 “나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입니다. 실명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실명 때문에 순수한 인간애와 숭고한 봉사정신으로 나의 반려자가 된 아내를 비롯,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인간승리자로 되는 데 필요한 인간천사들도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며 자신의 첫번째 국제무대연설을 했다.

석 회장의 본명은 석경숙이다. ‘석은옥(石銀玉)’이란 이름은 남편 강영우 박사가 1968년 12월 22일 청혼 후 지어준 이름으로 30년 인생계획을 담고 있다.

석 여사와 강 박사가 처음 만난 1961년부터 첫 10년은 맨발로 돌밭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석(石)의 시대, 다음 10년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공통된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은(銀)의 시대, 나머지 10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회에 봉사하는 옥(玉)의 시대를 보내자는 것이다.

1991년 옥의 시대가 끝나고 지금 석은옥 여사의 이름은 ‘석은옥주’다. 1992년부터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의 삶은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사는 주(主)의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30년은 우리들이 계획한 것을 실천하면서 살아왔는데 1992년부터는 우리가 계획하지 않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이름이 석은옥주입니다(웃음)”

석 회장은 2006년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을 창립해 활동하며 주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은 그동안 미국 양로원 정기적 방문, 가정폭력 피해 여성돕기, 한인자녀 장학금 지급, 한인장애인 교육기관·한인여성 셀터제공기관 지원, 한인독거노인 장례금 지원, 한인여성 이민수기·한인 어머니 수기 공모 및 시상, 국제결혼가정 선교회 버지니아 지부 후원 등의 활동을 해왔다.

석 회장은 두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이번 여름에는 할머니로 손녀를 직접 두 교회 여름성경학교에 데리고 다니며 기독교 신앙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도 애쓰고 있다.

“내 스스로에게 기쁜 것은 내 인생에서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한 사람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글에 문제가 있으면 말씀 주시면 즉시 지우겠습니다. 아름다운 사연이라 가족사진과 석은옥 여사님의 사진을 올렸습니다.

          오늘 하루 그님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슈만의 '헌정'곡을 바칩니다  ***

 

 

 

81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먼훗날 후회하지 않을 삶을 위하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을 위하여 첫번째 할일 사랑에 송두리째 걸어보기 두번째 소중한 친구 만들기 세번째 은사님 찾아뵙기 네번째 부모님 발 닦어들기 다섯번째 영광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여섯번째 고향 찾아가기 일곱번째 지금, 가장 행복하다고 외쳐보기 여덟번째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 아홉번째 마음을 열고 대자연과 호흡하기 열번째 두려움에 도전해보기 열한번째 경쟁자에게 고마워하기 열두번째 추억이 담긴 물건 간직하기 열세번째 사람 믿어보기 열네번째 다른 눈으로 세상보기 열다섯 마음을 열고 세상 관찰하기 열여섯 친구 모임 만들기 열일곱 낯선 사람에게 말 걸어보기 열여덟 사랑하는 사람 돌아보기 열아홉 단하루,동심 즐겨보기 스무번 동물 친구 사귀기 스물한번 3주 계획으로 나쁜 습관 고치기 스물두번 인생의 스승 찾기 스물세번 큰 소리로 사랑해라고 외쳐보기 스물네번 혼자 떠보기 스물다섯 남을 돕는 즐거움 찾기 스물여섯 혼자 힘으로 뭔가를 팔아보기 스물일곱 일기와 자서전 쓰기 스물여덟 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스물아홉 작은 사랑의 추억 만들기 서른번째 날마다 15분씩 책읽기 서른한번 정성이 담긴 선물하기 서른두번 나만의 취미 만들기 서른세번 용서하고 용서받기 서른네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기 서른다섯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기 서른여섯 건강에 투자하기 서른일곱 악기 하나 배워보기 서른여덟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 서른아홉 고난과 반갑게 악수하기 마흔번째 나무 한그루 심기 마른한번 약속 지키기 마흔두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우기 마흔세번 먼곳의 친구 사귀어보기 마흔네번 서소한 것의 위대함 찾아보기 마흔다섯 자신에게 상주기 마흔여섯 꿈을 설계하고 성취하기 마흔일곱 자신의 능력 믿기 마흔여덟 세상을 위한 선물 준비하기 마흔아홉 잊지 못할 쇼 연출해보기 - 탄줘잉 -

 

 어제는 평생 교육학습을 하는 날이였는데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는 시간 이였다.

침을 사가지고 와서 식구들에게 한번 해 줄 생각이였는데 사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 때문이였다.

자신은 침구사 자격증도 있고 많은 공부도 했는데 이렇게 우리처럼 평생교육을 통해서 알게된 이웃이 갑자기 한밤중에

전화가 와서 좀 와달라고 하여 달려 갔더니 그집 주인이 갑자기 뻣뻣해지면서 정신을 잃어갔다고...그래서 119에 전화를

하라고 하고는 자신은 늘 하던데로 10손가락에 침을 놓아주고 피를 빼주었다는 것이다. 119차가 오기전에 응급처치를 했는데

결국 그분은 병원에 가서 돌아 가셨다는 것인데 후에 가족회의를 하여 선생님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자신은 또 몇가지 다른 사례도 있었고, 자신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알고 있는 기술로 응급한 사람을

늘 하던데로 치료해주고 좋은 일 해 주었을 뿐인데 그 책임을 지라고 하니... 그래서 어제도 부항만 뜨고 사혈은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겁도 많은데 나 자신부터 자신감없이 침을 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쑥뜸을 뜨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뜸뜬 자리가 가렵기 시작하고 좁쌀알같이 돋았다. 식구들은 모두 하지 말라고 ....일주일을 참다가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드니 안좋은 것이 들어난다는 것이고...좀 쉬었다가 계속 하면 좋다고 하신다. 27일 다시 전 선생님이 오시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늘 제 블로그를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이야기씨리즈는 책도 여러권 나왔고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이 기쁨을 헛되이 보내지말고 다시 못 올 오늘을 보람되게 성실하게 내 인생에 다시 못 올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이 보내야하겠지요....

늘 맑고 향기로운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책속에 스님께서 감명 깊게 읽으신 책들 중에서 '월든'을 읽었고 다음으로 '대화'를 다 읽었는데 적어둔 저서들을 도서관에서 찾는데로 다 읽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짧지 않은 나의 인생의 회고록 또는 자서전 이다 . 회고록의 통상적 형식인 본인의 일인칭 서술이 아니라 '대화' 형식인 까닭은 개인사적 사실 내용과 삶의 방식에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질문자와의 비판적 토론 방법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 얽혀서 진행된 국내상황과 시대정신, 20세기의 인류사적 격동의 의미와 가치를 나의 세계관의 모색과 더불어 음미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사상사'적 담론이 전체 내용의 절반을 이룬다.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으로 한 연유이다. 전체 내용의 앞 부분은 개인사적 성격에서만 보자면, 일제 식민지하의 소년시대에서부터 이승만정권 말기까지를 다룬 기왕의 '역정 나의 청년 시대' 리영희 자전적 에세이1988창작과 비평사와 시간적으로 중복된다. 하지만 단순한 연대기적 내용은 대폭으로 축소 생략되었다. 그 시기는 이를테면 지성인으로 성장하는 한 개인의 전사(前史)단계이다. 일제 식민지하에 놓인 조선과 조선인의 생존환경의 체험적 서술이다.

 

단순 기능직 전문가로서의 '지식인'이 아니라 시대의 고민을 자신의 고민으로 일체화시키는 불란서어의 뉘앙스(함의)로서의 인텔리 즉 '지성인'에 해당하는 나의 삶의 시간적 구간은 약 50년 간이다. 6.25전쟁의 지겹도록 혐오스러운 7년간의 군복무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하나의 자유정신의 인격체로서 1950년대 중엽부터 언론인과 대학교수, 사회비평가와 국제문제 전문가로서 활동한현재까지를 말한다. 이 긴 시간에 걸친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 '이였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난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 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 커녕 '상상'조차 범죄로 규정했던  대한민국에서랴....읽는 이를 위하여 라고 책머리에 쓴 리영희님의 글을 다 옮길 수 없어서 사진으로 찍은 연보와 소개글을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글은 그만 생략하기로 하고...

 

746페이지에 달하는 두터운 책을 읽어가면서 그토록 정의롭게 힘겹게 지켜온 전쟁과 이념의 격동기를 살아온 한 지식인의 아픔과 자존을 공감하게 된다. 숱한 옥사와 회유과 금력과 권력의 핍박속에서도 굽히지않고 시대를 앞서가는 해박하고 예리한 판단력과 급변하는 세계정세까지도 헤아리고 있는 석학을 정치하는 사람들이 감옥이나 가두려고 한 지난 날 우리나라의 권력 중심에서 우리가 까맣게 모르고 지내온 세월들을 샅샅히 파 헤치고 있음에 놀람과 감동을 받게된다. 그 당시의 대학생들은 누구나 읽었을 것이라고 짐작 되지만....

 

한 지식인이 대쪽같은 절개와 학같은 고고함으로 방황하고 절망하는 군중들에게 희망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등불 역활을 해 오면서 자신이 감내해야할 무거운 형벌과 삶의 고달픔과 생활고속에서도 권력에 동조하지않고 힘들게 지켜온 그의 선택과, 어떤 악조건속에서도 소리침을 잊지 않은 그 맑고 깨어있는 정신 앞에 존경과 박수를 보내면서....그동안 너무 모르고 살았던 큰 인물 리영희님에게 고개 숙여서 진정어린 박수를 보냅니다....왜 이 책을 법정스님께서 추천하셨는지도 알게 된 것 같다. 두 분다 세속의 시류에 합류하지 않은 정말 맑고 향기로운 분 같아서 살아 가면서 이런 거목과 같은 분이 우리나라에 있었음에 감동받게 된다.

 

그가 살아오면서 교류한 고운 벗님들과 그에게 빛이 된 도움을 준 많은 분들의 이름도 나오고, 그렇게 혹독하게 고문한 이름들도 나오는데, 시대를 앞서간 많은 아름다운 이름들에 또한 경외심을 표하면서 두터운 책 중간 중간 해박한 지식과 폭 넓은 독서와 지식인답게 스스로 깨친 불어와 중국어까지 원서를 볼 정도로 능통하시고,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미군부의 통역관을 지내셨으니 영어에는 그 누구보다 능통하시며... 잠시도 쉬지않고 독서하시고 동서양의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는 모든 서적들을 통달 하심과 아울러 그가 인용한 중국의 고시부터 아름다운 시어와 문장들에 감탄하게 된다. 아직 못 읽으신 분은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적극 추천 합니다. 그가 존경하는 로쉰의 아큐정전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철없이 읽은 기억이 새삼스럽다.

 

수많은 인용글 중에서 명심보감에 나오는  "노요지마력 일구견인심"(路遙知馬力 日久見人心);"먼 길을 가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긴 세월을 지내봐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군자지교 담여수 소인지교 감여례" 군자의 사귐은 덤덤하기 물과 같고 소인 사귐은의                                                         은  그 맛이 달기가 감주와 같다.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고마운 인사를 보내면서...

오늘 아침은 다시 조금 춥다고 합니다. 옷 잘 챙겨 입으시고....

빠트린게 하나 있어서...리영희님의 사모님 윤영자님께도 박수를 보냅니다. 긴 세월 가난한 살림에 그 뒷바라지에 얼마나 큰 힘이 들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넘치는 운동권 학생들과 사회명사들이 그 집으로 몰려 갔다고 하니...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며,  봄향기 가득한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어느 대학교 졸업 식장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효는 백행의 근본임을 알 수 있는 좋은 글을 오랫만에 이사장님께서 보내 오셔서 소개 했습니다.

위에 사진은 서울 근교에 봄이면 눈부신 노란 개나리동산을 절에 갔다 오면서 보살님 차 안에서 찍은 것인데 너무 멀어서 핸드폰으로 찍어서 그런지

사진이 환하질 않네요...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고운 주말 보내셨는지요?

날씨가 좀 흐린 것 같습니다만 이번주가 봄꽃 향연의 피크가 될 것 같은데...가까운 윤중로 벚꽃잔치도 한번 보러 가시고...

고운 한 주 힘차게 열어 가시기를~~~~늘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빌면서~~~*^^*~~

 

 

 

 

 

행복에 이르는 비결

 

kbs 방송 아침마당에 오종남 전 통계청장이 나와서 재미있는 강의를 들려주셨다.

<은퇴 후 30년을 준비하라>는 책을 비릇 하여 많은 저서를 출판하셨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출산율이 한 가정에 6명 이였는데 요즘은 1.2명이라고 하는데 결국 이 말은 예전에는 자식 6명이 부모를 모셔야 한다면 요즘은 자식 한명이 내 부모님과 친가 쪽 할아버지, 할머니, 외가 쪽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6명을 부양해야 하는 그런 부담을 안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셨다.

 

3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고 노후 30년을 대비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평균수명이 80-90세를 사는데

노후가 준비된 자와 준비 안 된 자로 구분하면서 지금 우리세대가 샌드위치세대 낀 세대라고도 하지만

어느 분은 말초세대라고도 한단다.

마지막 효도하는 말 세대이며 효도 못 받는 초 세대라는 의미라고...

 

그러면 노후 대비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 하면서 우리가 초등학교때

국어공부는 주제파악이란 말이 많이 나왔고

산수공부는 분수를 잘 해야 한다고...

고로 주제파악을 잘하고 분수를 아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 이 순간부터 자식에게 올인 하지 말고 절반만 투자하고 그 반은 나를 위해 투자하라

우리 어머니세대는 아들의 성공이 엄마의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부모님의 희생위에 오늘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세대의 진정한 자식 사랑은 장례비를 남겨놓고 죽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죽음이라고 한다.

유산을 많이 남겨서 자식들 싸움 하도록 하지 말고...

하버드대학의 맹큐 교수는 2008년 뉴욕 타임즈에 '나의 생일 소원'이란 글을 발표 했는데

"우리 자식에게 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인생이란 먹고 사는 것인데 먹는 것만 만족하는 것은 돼지나 소같은 축생과 이며

인간의 삶은 사는 맛을 느끼고 곧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데 행복은 어디에서 찾는가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이스틀린의 역설

 

                        내가 가진 것

참 행복지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곱하기 100

                       내가 바라는 것

 

자신이 행복한지 자가 측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적어 본다

실제로 성취된 것에 동그라미를 쳐 본다.

바라는 것은 100개인데 가진 것이 80개라면 행복지수는 80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더 많이 성취하는 것과

더 적게 바라는 것이 행복지수가 같다는 것이다.

바라는 것 보다 더 많이 가진 자가 나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행복지수가 100을 오버하여 120이 된다는...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수라고 한다.

 

< 행복에 이르는 비결 >

 

1. 자식에게 절반만 투자하라

2. 적게 바라는 마음을 가져라

3.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4. 남과 비교하지 마라

5. 나눔을 실천하라

 

2500년전 춘추전국시대에 섭공이란 제후가 살았는데 백성들이 다른 곳으로 자고 나면 떠나가고 떠나가고하여 공자를 찾아가서 높은 성벽을 쌓아서 백성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지 여쭈었더니 공자 왈

<근자열 원자래> <近者悅 遠者來>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까지 찾아 온다

 

나와 인연 지어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잘 하라는 말이다.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외롭게 슬프게 하면서

어떻게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잘 생각하고 반성하면서...사회활동은 열심히 하면서 가정에 태만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재미있는 이야기 몇 개를 더 적어 보자면...

 

김수환 추기경님이 어느곳에 강의를 가서 카이스트인지 확실히 기억이 안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강단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을 끄내자 모두 어떤 말이 나올 것인지 귀를 쫑긋하고 있는데

'삶은 계란이다....나도 이제까지 삶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오늘 그 답을 알았다'고 해서 모두를 웃겨 주었다는 이야기..

재미있게 강의 하라는 의미로 들려 주었다는... 

 

<3대 실패>

 

1.청년 출세

2.중년 상처

3.노년 무전

 

<3대 바보>

 

1. 손자 손녀 돌본다고 스케쥴 바꾸는 노부부

2. 미리 재산 분배해주고 용돈 타 쓰는 노부부

3. 아들 딸 손자 손녀 자고 갈까봐 집 늘려가는 노부부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고마운 인사를 전하면서

4잎 클로버의 행운을 찾으려고 행복이라는 3잎 클로버를 짓밟는 우를 범하지 마시라는 말을 전하면서...

늘 맑고 향기롭게 지족하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

 

 

 

 그날 아침 집안이 시끄러웠던 것은 청바지 때문이었습니다.

윤희는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청바지를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동네 시장에서 파는 청바지보다 몇 배나 비싼 바지였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윤희는 한참 멋부리는 데 관심을 많

이 가질 나이였습니다. 사실은 그 청바지 자체보다는 브랜드가

더 좋았던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자랑하면서 그 청바지를 입

고 다니는 게 부럽기도 했지만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윤희네 반에서는 요즘 청바지에 붙은 상표를 보는 것이 유

행이었습니다. 이미 같은 반 친구들 중 절반 정도가 이름만 대

면 알 만한 브랜드의 청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윤희네 집안 형편은 어려웠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초등

학교만 간신히 졸업하셔서 변변한 일자리 하나 얻기 힘드셨습

니다. 그래서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온 다음에는 산

동네에 단칸방을 하나 얻어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살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지 못하면서도 윤희에게만

큼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려고 늘 애쓰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윤희는 구김살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고등학생을 감당하기에

부모님의 부담은 너무 컸습니다.

 

 윤희는 절대 1등을 놓치지 않는 등생이었고, 학급 반장까

지 맡고 있었습니다. 얼굴도 예뻤고 정말 가난하다는 것 빼고

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소녀였습니다.

 

 아버지는 고물상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결혼을 늦게 해서

벌서 환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고물상에 실려온 폐지 등을

분류해 트럭에 싣는 게 아버지의 일이었습니다.

 

 윤희는 누구에게도 아버지가 고물상에서 일하신다는 얘기

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도 윤희네 집 사정을

몰랐습니다. 꿈 많은 소녀 윤희에게 가난은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습니다.

 

 청바지 문제가 처음 윤희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 며칠 전이

었습니다. 윤희는 점심시간에 가장 친한 친구 신애와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윤희야, 넌 왜 청바지 안 사니? 동네 버스 정류장에 매장도

생겼더라."

 

 "응, 난 별로 예뻐보이지 않던데, 엄마가 더 비싼 청바지 사

준다고 하셨어."

 

 "야, 좋겠다. 나는 청바지 사는 데도 일주일을 졸랐는데······.

그것도 앞으로 6개월은 아무 옷도 사지 않기로 엄마랑 약속까

지 했는 걸."

 

 드디어 오늘 아침 밥을 먹다가 윤희는 청바지 이야기를 꺼

냈습니다.

 

 "엄마, 내가 전에 말했던 청바지 사줘."

 

 "너 정신이 있니. 어떻게 한 학기 등록금보다 더 비싼 청바

지를 사달라고 하니."

 

 "우리반 애들 다 입고 다녀. 그 청바지 안 입으면 애들이 무

시한단 말야."

 

 "뱁새가 황새를 어떻게 따라 가겠니."

 

 "무조건 사줘. 우리 집 가난한 거 티내고 싶지 않아. 난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난 거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잠자코 아침을 드시던 아버지가 입을 여셨습니다.

 

 "그만해, 여보."

 

 아버지는 옷을 차려 입으시면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셨

습니다.

 

 "청바지 사 입어라."

 

 아버지는 꼬깃꼬깃 접힌 만 원짜리 지폐 여러 장을 윤희에

게 내미셨습니다.

 

 "여보, 그건 당신 자전거 바꾼다고 1년 동안 모은 거잖아요."

 

 "됐어. 자전거야 뭐 나중에······."

 

 아버지는 나가셨고, 윤희도 얼른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신애을 만났습니다.

 

 "신애야, 오늘 수업 끝나고 청바지 사러 가자. 내가 떡뽁이

도 사줄께."

 

 "그래 좋아."

 

 버스가 오자 둘은 버스에 탔습니다. 버스가 한 정류장 지났

을 때 저쪽 편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몇 년째 쓰고 계

신 낡은 모자에 빛바랜 점퍼가 유난히 눈에 띄었습니다. 온 세

상의 짐을 다 짊어지신 듯 힘겹게 낡은 자전거 페달을 밟고 계

셨습니다. 안간힘을 쓰며 오르막길을 오르시는 아버지의 모습

이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버스가 아버지를 앞질러 갈 무렵 낡

은 자전거에서 나는 삐걱대는 소리가 버스 안에까지 들렸습니

다. 이제는 자전거 수리점에서도 더 이상 못 고치겠다고 두 손

을 든 바로 그 자전거였습니다.

 

 자전거 바꿀 돈을 딸의 청바지 값으로 내민 아버지는 또 얼

마나 오래 저 자전거를 타야 할지 모릅니다.

 

 윤희는 그날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아버지 모습이 떠나질 않

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신애

가 윤희의 옆자리로 왔습니다.

 

 "윤희야, 가자. 청바지 사러."

 

 "아니, 안 갈래."

 

 "왜?"

 

 "내일 모레 아버지 생신이야. 청바지 살 돈으로 아버지 선물

살래."

 

 윤희의 머릿속에는 기어가 달린 새 자전거를  보고 깜짝 놀

라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려졌습니다.

 

 

 출처 : 한 달이 행복한 책 (유 린 지음)

 

 

       

 

 

 

 

 

 

 

 

 

 

 

 

 

   오늘은 평생 교육원에서 온열 사혈 테이핑요법에 대해서 배웠다. 선생님도 심원기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신 선생님께서는 통증 요법사, 카이로 프렉티사, 전통침구사, 음양맥진 안전 관리자, 중국 괄사 시술자격증을 가지고 계시며 자연치유연구소를 운영하시는 분이시다.

 

선생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모든 자격증도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생활하면서 내 몸 건강을 내가 챙기고 쉽게 실천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침을 놓는 것이나 뜸을 뜨는 것도 다 번거롭기도 하고 냄새도 심해서 식구들이 싫어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부터도 딸애는 회사에서 자기 옷에 담배냄새가 난다고 할지도 모른다고 쑥 뜸 뜨는 것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거나 말거나 토 일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할 생각인데 한번 하고 나서는 집에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고 시켜도 밖에서 들어오면 금방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가 몸이 따뜻하면 질병을 예방 할 수 있고,  배가 차가우면

1. 모세혈관이 수축되고

2. 혈류량이 감소되고

3. 통증 저림증 부종이 생긴다는 것이다.

 

***배를 따뜻하게 해 주는 방법으로는

 

뜸 , 반신욕,  산삼,  홍삼을 먹으면 좋은데 아는 분의  아버님이 104살까지 살다가 돌아 가셨는데 평소 운동도 별로 안하시고 꼭 한 가지 실천 하신 것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배를 감싸는 포대기 같은 것으로 꼭 감고 계셨다는 것이다. 배를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질병예방에 좋은데 요즘 아주 간편한 핫 팩 요법을 추천하셨다.

 

임산부나 노약자에게 좋으며 어떤 부작용이나 불안감이나 공포심 없이 할 수 있다는 편리함도 강조 하셨다.

자신이 젊어서 몸이 안 좋았는데 꾸준히 대체의학요법도 하고 침으로 사혈도 하며 어혈을 빼주어서 많이 좋아 졌다는 말씀이셨고 사진도 보여 주었는데 머리에도 수시로 침을 찔러 주어서 머리숱도 많아지고 더 빠지지 않고 좋아 졌다고 하셨다.

사진으로 보니 젊었을 때 보다 더 얼굴이 좋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침이 그리 비싸지도 않아서 침과 일회용 바늘을 구입했다. 한번 씩 사혈을 해 주면 좋다고 하신다. 꼭 아프지 않아도 말이다.

바늘의 굵기는 23-28G까지 있는데 28호가 제일 가늘다고 한다. 바늘을 꽂은 후에 한 바퀴나 반 바퀴를 열어서 침을 찔러주면 아프지 않고 그냥 따끔한 정도이기 때문에 초등학생들도 아프지 않다고 한다. 침을 놓기 전에 손을 한참 부비어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침을 놓을 손가락 아래부터 위로 죽 훑어가서 마지막 끝마디 안쪽으로 살짝 찔러주면 피가 나오는데 처음엔 좀 진하고 굳은 듯한 피가 나오니 짜서 버리고 두 번 세 번 피가 흘러내릴 때 까지 따주면 좋다고 한다.

 

난생 처음으로 내 손을 내가 따 보았다. 선생님께서는 본인이 먼저 해야 하고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직접 하라고 하셔서 실습을 해 보았다. 오늘 주문을 하고 왔으니 다음 주 부터는 이제 집에서 부항도 뜨고 사혈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혈침은 여행이나 등산등 갑자기 병원에 가기가 어려울 때 급체에 좋다고 하시면서 꼭 가지고 다니라고도 말씀 하셨고.

테이핑효과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주시면서 파스나 밴드보다도 지지와 순환작용이 뛰어나니 이용해 보라고 하셨다.

위에 사진에 보이는 테이핑을 참조 하시어 허리가 아프거나 발바닥 손목 목 등이 아플 때 근육을 늘려주면서 부쳐야 함을 잊지 마시고 한번 사용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첫번째 사진에 실린 보왕삼매경을 꼭 보시기를...회장님이 열심히 자신이 알고 계신 지식들을 밤잠을 안 주무시고

써오셔서 우리에게 복사해서 나누어 주심에 고맙고 감사하다. 모든 은혜중생의 공덕과 베품을 받고 살고 있음에 저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스캔 해 가시도록 해 두었습니다.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고마운 인사를 보내면서...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고, 봄 향기 가득한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어제는 씨애틀에서 오신 금모래님을 만났다. 처음에는 우리 동네로 오시라고 했는데 식당에 주인이 바뀌어서 예전의 그 맛이 아닐 것 같기도 하고 3시간 전 예약을 해야 하는데 전화를 안받아서... 충무로에 있는 진고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 바로 옆에 있는 한옥마을에 갔다. 나도 처음 가 본 곳인지라 여기 저기 구경할 것이 많았다. 지하철3호선이나 4호선 충무로역 3번 출구로 나가서 나온 방향에서 뒤로 살짝 돌아서 주유소 옆길로 가면 금방 나온다.

 

 

안내 글에 보니 남산 북쪽 기슭 한옥 마을이 들어선 필동지역은 조선시대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 여름철 피서지를 겸한 놀이터로 이름 있던 곳이며 청학이 노닐었다고 하여 청학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옛 정취를 되살려 시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서울의 8대가중 하나인 박영효가옥으로 부터 일반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전통한옥 다섯 채를 옮겨다 놓았다고 한다.

 

 

조선27대 순종의 부인인 순종황후가 동궁계비로 책봉되기 전 13살까지 살았던 집과 해풍부원군 윤영택 재실과 부마도위 박영효가옥 오위장 김준영 가옥 도편수 이승업 가옥 등의 세간살이와 부엌살림등 그 시대의 가옥형태와 여러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 글이 비치되어 있으니 꼭 챙겨와 읽어 보면 좋을 것 같고, 공부하는 학생들도 한번 와서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전통혼례, 예절학교, 소리마당, 전통공예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인과 중국인 단체 여행객들이 엄청 많이 온 것 같았다. 아직 산수유와 진달래만 조금 피어서 아쉬웠고 입장료는 받지 않으니 부담 없이 보시면 좋을 것 같다. 금모래님께서 모처럼 한국에 오셔서 청계천은 가 보셨다고 하시고 한국의 발자취가 살아 있는 곳을 보셔서 좋아 하셨다. 연세가 드셨음에도 배움에 열정적이신 분이시라 잠시 장구, 북, 징, 꽹가리 등을 배우셨다. 나이보다 무척 젊어 보이시는 이유가 도전정신이 강하시고 배울 기회를 놓치지 않으신다는 점이 놀랍고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된다.

 

 

 

 

덕소에 약속이 잡혀서 커피를 못 마시는 나 때문에 근처에서 아이스크림 와플을 먹고 헤어져서 돌아 왔다. 용산역에 내려서 덕소 가는 전철로 갈아타시라 하고 왔는데 참 기분이 좋고 배울 점이 많은 멋진 분 같아서 저렇게 나이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와 초콜릿 선물도 받았다. 덕분에 고운 하루를 보내고 와서 기분이 좋다.

 

참 멋진 말씀도 해주셨다. 유럽11개국을 방문할 때 일행이 좀 많아서 39명인가 그랬는데 다툼이 있어서 자신이 해준 이야기라고 하신다. 4대째 목사를 하고 계신다니 그 인품이야 더 말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람과의 만남에는 5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신다.

 

1번째 만남은 인사만남이라고 하셨다.; 그냥 몇 번을 만나도 인사만 나누는 그런 사이

 

2번째 토론만남 ; 어떤 사물에 대해서 옳고 틀리는 의견만 나누고 자신의 뜻은 밝히지 않는 만남

 

3번째 만남은 옳고 틀리는 의견에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만남

 

4번째 만남은 감성만남 ; 필링이 통하는 만남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나누며 서로 통하는 필을 발견하는 ....

 

5번째 만남은 비젼 만남; 같은 방향을 보고 서로 교감하면서 비젼 있는 앞날을 위한 희망적인 만남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좋은 만남을 위해서는 어쩌면 전생으로 부터의 고운 인연이 닿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베풀고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그런 고운 만남이 되고 그런 필이 통하는 비젼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좋은 인연의 끈이 닿아야 할 것이다. 찬불가 노래에 '옛 인연을 이어서 새 인연을 맺도록....~~~' 이란 가사가 있다. 요즘은 새 인연을 맺기 보다는 이왕 맺은 고운 인연을 이어서 단순하게 살고 싶은 욕심뿐이다

 

 

살아가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참 고운 인연이 되기를 바람하면서....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에게 머리 숙여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늘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고 좋은 만남의 고운 인연의 끈 맺으시기를~~~

 

 

 

 

 

 

 

 

 

 
 
 
뇌가 건강해지는 10가지 방법
 
 

 

01. 연결시켜 기억하라
정보를 얻고 저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조합이다.
학습능력과 기억력을 좋게 하려면 배우는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만들어주면 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이름을 외울 때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을 처음 만난 장소,
그 장소에서 들었던 음악 소리 등과 연결시켜보는 것이다.
새정보와 이미 알고 있던 정보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겨 또다른 정보가 생겨나게 된다.

02. 양손을 사용하라
뇌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오른쪽 뇌와 왼쪽 뇌로 나눠져 있다.
신체로부터 전달되는 대부분의 정보가 오른쪽과 왼쪽으로 서로 교차돼 전달된다.
왼손이나 왼쪽다리에서 온 정보는 오른쪽 뇌로, 오른쪽 손에서 온 정보는 반대로 가는 식이다.
양손을 사용한다면 뇌를 균형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글씨를 쓸 때 오른손을 사용하더라도 칫솔질은 왼 손으로 하는 거다.
넘쳐나는 정보의 바다속에서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한쪽 뇌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03. 잠자기 직전에 공부하라
꿈은 아직까지 그 본질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동물 실험은 꿈이 우리가 전에 경험하거나 배운 것이나
남겨 둔 문제들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을 반복하도록 만든다.
잠자기 전, 꿈꾸기 전에 외운 것이 더 잘 기억되는 이유다.

04. 외우지 말고 이해하라
인간의 뇌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주변환경에 적응해 살아가기 위해 진화해왔다.
주변 환경을 분석하고 이해하면서 작용하도록 돼 있다.
뇌는 그래서 단순히 암기한 것보다는 이해한 것에 대해 특히 잘 기억한다.
뭔가를 배운다면 이것을 왜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지
뇌에게 잘 "설명"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05. 오래 사귈수록 나쁜게 TV다
텔레비전을 오래 시청하면 뇌에 좋지 않다.
텔레비전은 한꺼번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줘 뇌가 그 정보를 스스로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텔레비전을 오랫동안 보게 되면 뇌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나중에 뇌가 새로운 정보를 능동적으로 얻고 처리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다
. 앞으로 2~3 동안만이라도 텔레비전을 켜지 말고 생활하보라.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겠지만,
얼마 지나면 전과는 다르게 머리가 맑아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06. 일상적인 것에 반대하라
우리의 뇌는 변화를 즐긴다.
틀에 박힌 것은 싫어한다.
단조롭고 변화가 없다는 것은 뇌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뇌는 일상적이고 변화가 없는 정보는 소음처럼 여기고 기억하지 않는다.
가령 여러 권의 책을동시에 읽는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
첫번째 책을 30분 동안 읽다가 이어서 다른 책으로 넘어간다.
교과서를 읽다가 시집이나 재미있는 잡지를 읽어본다.
이렇게 하면 뇌가 집중력을 잃을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07. 여행하라
여행은 뇌를 재충전하고 깨어있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국적인 곳을 여행할 수록 풍부한 자극을 경험하게 돼 더욱 좋다.
여행은 뇌의 환경이 결정되는 12세 전후가 지나기 전에 할 수록 좋다.
새로운 장소나 다양한 인종, 이국적인 음식들을 접하면 뇌의 활동에 도움이 된다.

08. 새로운 것을 먹어라
늘 먹던 음식보다 한번도 먹지 못했던 음식,
예를 들어 인도나 태국음식 등에 도전해보자.
새로운 음식은 뇌에 새로운 자극을 줘 일상생활에
지쳐 있는 머릿속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09. 도전하고 배워라
뇌는 도전을 즐긴다.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거나 글을 써보거나 모형비행기를 조립하는 것 무엇이라도 좋다.

10. 남들따라 하지 말라
뇌는 도전을 좋아하는 동시에 다른 것을 잘 따라한다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뇌가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 하는 뇌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앞으로 20~30년 동안 무슨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할 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정말로 하고 싶은 그 일을 하라. 즐기면서 하는 일은 보상도 따른다.
 
출처 : 카이스트 이수영 교수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고운 주말 보내셨는지요? 새로운 한 주 힘차게 열어 가시기를 바램하면서...

이제 천지에 봄꽃의 향연이 펼쳐지겠지요...

 

세상은 우울한 소식으로 슬픔에 잠겨 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봄의 잔치를 선물합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동업중생의 아픔을 같이 하는 마음으로 천안함과 같은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

운명을 달리한 모든 분들의 넋이 왕생성불 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늘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한 맑고 향기로운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