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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joins 블로그에서 빈선님의 좋은 글이 있어서 퍼왔습니다. 상당히 긴 글인데 금강경 역해와 관계된 2와 3부분을 발췌해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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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같은 말씀, 금강경을 읽으며



2.

쇠귀에 경(經)읽기란 말이 있듯, 경이란 주의깊은 정신에게만 길을 내주는 누군가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보통말과 다르다는 의미로 성(聖)자를 붙인 성경이 그렇고 부처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불경이 또한 그렇다. 당연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정신에게는 뜬금없고 따분하고 한가하고 불필요한 사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경을 말하는 쪽은 긴급하고 답답하고 절실하다. 어쩌면 경이란 전해주고 싶어하는 쪽과 알아듣지 못하는 쪽이 겪는 불완전한 소통의 고통을 함의하고 있는 무엇이다. 매력적인 지혜는 인간의 깊은 곳을 울리는 힘이 있다. 내가 쇠귀가 되어 들은 경일 망정, 금강경은 이 짧은 겉핥기를 통해서도 짠한 뭔가를 던져주고 간다.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이후 두번째로 만난 이 경은,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같은 책이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가 있나. 처음은 쉬운 듯 어려웠고 두번짼 어려운 듯 쉬운 생각을 품고 있었다.

책이 좋다 싶으면 자꾸 앞장을 들쳐보게 된다. 처음에 건성으로 흘러왔던 대목을 되살피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 책을 펴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행동이다. 불광출판부에서 나온 금강경역해를 읽으면서도 몇번 그랬다. 각묵스님이 어떤 사람인가. 우선 산스끄리뜨 원전과 초기불교 언어인 빠알리어에 능통해보이는 어학실력이 놀랍고 그 원어들에 대한 정치한 접근 뿐 아니라, 구마라집과 현장이 그것을 한자로 번역하는 방식을 서로 대조하여 부처가 실제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성실한 노력이 참 좋아보였다. 불교라는 어떤 특별한 영역에서만 귀감되는 행동이 아니라, 공부를 하는 태도의 치열함이란 측면에서 많은 이의 선생이 될 만하다 싶었다. 책을 읽노라니 현재의 이 나라 불교계가 빠져있는 미망을 과감히 적시하고 그 대안을 이 부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고 소리 높이는 열정도 듣는 귀를 즐겁게 한다. 그런데 그의 약력이 없다. 그런 걸 구차스럽다 생각했을까. 한자론 覺默일 듯 싶은데 이렇듯 자신의 공명에 침묵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이름이기에 그에게로 다가가는 인간적인 관심의 소롯길을 막아버린 것일까. 다만 짐작지어지는 바로는 와룡산 구룡사라는 어딘지 아리송한 절에 은거하는 학구파 스님인 듯 싶다. 후기에 보니 10여년 간 인도 유학을 다녀왔고 작년에는 네팔에서 티벳 사람들과 탑돌이 정진도 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 이력을 포함해 한 이십수년 간을 불교에 정진해온 분인가 보다. 그렇게만 알고 있자. 실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금강경은 이 나라 불교에서는 국어책처럼 중요한 위치다. 불교서점에서도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다. 불교방송에서 어느 스님은 금강경은 불교의 최고 성경이라고까지 말하는 걸 들었다. 경(經)자 붙은 것들이 많아서 그런지 어느 경 어느 경을 나란히 세워 얘기하면 논지는 거칠지만 확실히 선명해진다. 금강경은 모든 경 중에서 1등경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들 생각한단 얘기다. 하도 부처의 말씀이 생생함을 강조하다 보니, 그 뜻이 뭔지 모르고 좔좔 외기만 해도 복덕이 쌓인다는 희한한 믿음까지 유포될 정도다. 금강(金剛)이란 금강석할 때의 금강이다. 금강이란 다이아몬드다. 아주 단단하고 빛이 찬란한 광석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 보듯 골기(骨氣)가 뛰어난 금강산의 이름에 박혀있는 금강을 보라. 여간 보배롭지 않으면 금강이 아니다. 그런데 그냥 단단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이아몬드로 유리를 자르듯이 어떤 다른 단단한 것이라도 잘라낼 수 있는 광석이란 의미에서 금강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금강은 산스끄리뜨어에선 와즈라체디까라고 한단다. 와즈까는 바로 다이아몬드요, 체디까는 한자어로 능단(能斷)으로 풀이한다. 뭐든지 자를 수 있는, 뭐든지 끊어낼 수 있는 그런 금강석을 와즈라체디까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금강경이란 말 속에는 이미 이 경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복선을 깔아 놓고 있다는 얘기다. 다이아몬드의 여러가지 성질 중에서도 아주 단단한 대상 조차도 끊어버릴 수 있는 기능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뒤에 붙은 말인 경(經), 즉 부처가 일러준 진리는 뭔가를 끊어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야기일 거라는 건 자연스럽게 짐작된다. 금강경은 담배를 끊듯, 술을 끊듯, 뭔가를 끊어라는 집요한 권유를 담은 책이다. 뭘 끊으란 말인가?

김지하가 내 가슴을 저릿하게 한 것은 <칼아>라는 제목의 시에서였다. 읽고가자.

미련의 베를

오늘은 끊으리라

애틋한 눈길 올올에 서린

색색이 아리따운 속삭임에 서린 아쉬움

끊어 떠나리 칼아

모진 그 옛 스승아

내 것이 아닌 이 묶이운 기쁨

흙내 바랜 육신에 깊이

뿌리 드리운 이 끝없는 부질없는 길쌈의 버릇

한 잔의 독한 술

넋을 판 날의 괴로움과 그 술이 짜이고

한 밤의 포근한 잠

이웃의 지친 설움과도 그 잠이 짜였네

짜여

때론 피할 길 없는 새벽녘 아픔이 된다 한들

죽음으로밖에는 죽음으로밖에는

씻을 수 없는 죄도 한 줄기 눈물로 씻겨 내려

배신이 지혜로 패륜이

서러운 사랑으로 바뀌는 미련의

아아 온갖 더러운 실마리의 오색으로

영롱한 이 짙은 짙은 미련의 미련의

미련의 베를

끊어

알 수 없는 거리로 먼 벌판으로

아픈 저 허공으로 오늘은 떠나리라

칼아

모진 그 옛 스승아.


언제 읽어도 결연하고 자기 내부를 향한 시선이 준렬하고 또 처해진 상황에 대한 인식이 처연해서 한참 멍멍하다. 하는 얘기는 금강경과 거의 이구동성이다. 뭐냐? 아쉬움, 미련, 유혹, 얽힘, 애틋함, 괴로움과 설움. 이 모든 것을 끊자는 얘기다. 뭐로? 칼로. 금강경의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예리한 칼로 베를 자르듯 단기(斷綺)를 실천하자는 얘기다. 자를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온갖 이유들 온갖 곡절들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거기 묶여 배신과 패륜과 온갖 더러운 실마리만 늘어놓지 않았던가. 기로에 선 저 김지하의 외침이야 말로 어느 날 부처가 문득 뭇사람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던 그 메시지의 절박함에 닿아있다. 책을 읽노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겨울 들어 아마도 가장 추운 새벽이리라. 어제 김지하의 <칼아>까지를 쓴 뒤 잠자리에 들었다. 혼곤한 잠 속에서 나는 각묵스님을 얼핏 뵌 듯 했다. 이 나라 불교의 중심인 조계종을 향해 그가 퍼붓는 질문들은 손을 얼게하는 오늘 이 추위보다 준렬하고 엄혹하다 싶었다. 그는 학구승답게, 자신의 목소리로 격앙하여 말하는 게 아니라, 금강경의 목소리로, 그리고 금강같이 단단한 부처의 언어들로 공안의 벼락깨치기에 경도된 선불교의 허황스런 현주소를 타파한다. 활활 타오르는 언어의 화염에 문득 덴듯 잠에서 깨어났다.

금강경을 다시 제대로 된 긴 이름으로 부르자면 <금강반야바라밀경>(구마라집) <대반야바라밀다경중의 능단금강分>(현장)이다. 반야바라밀이란 말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반야바라밀은 반야와 바라밀이 합쳐진 말이다. 우선 바라밀이란 '완성, 완결, 완전, 궁극'을 뜻한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여섯가지를 정하여(육바라밀) 보살의 서원을 가진 자가 반드시 실천궁행해야 하는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금강경의 이름에서 쓰인 뜻은, 앞의 반야를 강조하기 위한 의미이다. 우리가 요즘 자주 쓰는 초특급슈퍼울트라켑송나이스어쩌구저쩌꾸하는 그런 강조어법과도 비슷하다. 보통 반야가 아니라 최고의 반야,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반야란 뜻이다. 반야는 뭔가? '지혜'라고 옮기기도 하고, 그냥 '빤냐'를 음역해서 반야라고 읽기도 한다.

반야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반(般)은 한자 의미와는 상관없이 '앞으로(pro)'라는 뜻이고 야(若)는 '알게 됨(to know)'이란 뜻이다. 각묵은 이를 '더 나아가서 아는 것'으로 해석하고 '현상을 그냥 표면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이란 가장 높은 지혜로 나아가는 일이며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금강석처럼 단단한 지혜로 나아가는 수행을 담은 부처말씀이란 의미로 풀린다. 쉽게 말하면 '무지무지 중요한 말이니 밑줄 쫙 치고 들으라'는 얘기다. 그러나 쪽집게도사처럼 한번으로 대입오케이하는 식의 약속은 하지 않는다. 앎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약속 만을 한다. 읽는 이를 긴장케 하면서도 결연히 각오를 다지게 하는 이름을 경에다 붙여놓았다.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면서 '그게 뭐냐 하면..."하고 내놓은 게 뭔가? 바로 능단금강, 모든 것을 잘라내는 초강력 절단기를 들이민다. 생각해보라.

이 참에 공부 좀 하자. 부처때 사람들은 '안다'는 행위를 여러 단계 여러 갈래로 생각한 모양이다. 반야할 때 쓰인 '냐'가 '안다'의 의미인데 그 앞에 여러가지가 붙으면서 다양한 앎이 표현된다. 우선 '냐나띠'라는 게 있다. 모든 앎을 통칭하는 표현이리라. '산냐나띠'라는 것은 '함께'라는 접두어가 붙었다. 우리말로 '인식하다'라는 뜻과 비슷하다고 한다. 우린 줄기 위에 피어난 것들, 이를 테면 무궁화, 진달래, 개나리를 보고 그것들의 공통점에 착안해서 같은 이름을 붙여준다. 이른바 '꽃'이라는 이름이다. 그것이 산냐나띠의 앎이다. 무궁화도 실은 그 종류의 다양한 개별꽃들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이것

도 산냐나띠다. 무엇을 다른 사물과 연관짓고 보편화하는 행위가 바로 산냐나띠다. 그 다음 '윈냐나띠'라고 하는 것은 앞에 '분리해서'라는 접두어가 붙은 말이고, 풀이할 때는 식(識)이라고 한다. 지식, 인식할 때의 그 '식'이다. 이것은 여러가지 사물 속에서 구체적인 무엇을 알아내는 행위와 능력을 말한다. 여러가지 장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구체적인 '바로 이 장미'의 특징을 파악하는 지혜이다. 어렵게는 분지(分知)라고 부르는데, 분별하는 앎이란 뜻이다. 그 다음이 '빠자냐띠'다. 빠자냐띠는 아까 말한 반야이다.(정확히 말하면 '빤냐'의 동사형이다) 아까 이걸 무슨 지혜라고 했지? 앞으로 나아가는 지혜. 피상적인 분별의 지혜나, 이것저것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보편화의 지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뭔가를 알게되는 것, 이것이 바로 빠자냐띠다. 만일 꽃이 있다면 "아 저게 꽃이구나"(산냐나띠)와 "저건 분홍색으로 키가 큰 무궁화꽃이구나"(윈냐나띠)에서 "저건 지금 현재론 저렇게 머물러 있지만 곧 다른 상태로 변할 거야. 그리하여 살아있는 것들이란 늘 한결같을 수 없는 괴로움(苦)이야"하는 걸 알게되는 따위는 '빠자냐띠(반야)'의 지혜다.

저 위의 네가지 형태의 앎 외에도 불경들은 산빠자냐띠(이건 고루 잘 살펴 반야의 지혜를 가지는 것,正知), 아빈냐나띠(전생의 일을 아는 따위의 초월적인 지혜,勝知), 빠린냐나띠(두루 살핀 통찰의 지혜,洞知), 안냐나띠(모든 번뇌를 다 없앤 환한 경지의 지혜,圓知) 등이 있는데 옛 인도사람들은 '아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구나 싶은 생각만 든다. 이렇게 지혜를 구분짓고자 하는 일은, 아는 행위에 대한 치밀한 관심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 지혜들에 대해 헷갈리는 나의 마음은, 내가 많이 알지도 못하거니와, 아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얼마나 분간이 서툴고 치밀하지 못한가를 말해주는 증거이리라. 그래도 이 책의 맛을 봤으니, 최소한 윈냐와 산냐 그리고 빤냐에 대해선 늘 생각하며 사는 게 옳으리라.

어느 절에 갔을 때였는진 잊어버렸지만 그 절집 앞에 차린 찻집의 이름이 <여시아문>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如是我聞. 나는 이같이 들었다. 금강경의 첫 귀절이다. 원래 뜻은 이와 같이 (내귀에) 들렸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때의 '나'는 누구인가. 아난이란 제자이다. 부처의 말을 성경으로 공인하는 과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부처의 말씀을 정리하기 위해 모인 첫 모임에서 아난은 경(經)을, 우바리는 율(律)을 낭송했고, 그곳에 모인 500명의 아라한들이 그것을 함께 합송하여 인정하는 과정을 거쳐서 경과 율로 확정되었다. 아난과 우바리는 부처의 제자 중에서도 부처와 같은 말씨를 쓰는 동향사람이었다는 점에 각묵스님은 주목한다. 부처의 제자로는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받았던 가섭이 있었는데, 왜 부처는 아난 쪽에게 불경을 정리하도록 했을까.

경률을 공인하는 모임의 주도를 놓고 가섭과 아난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처의 이 결정의 의외성과 그에 대한 일부의 불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세존은 말년 22년간은 아난을 시자(侍者)로 둔다. 각묵은 이 까닭을 진리와 관련해 좀더 완전한 소통을 하고자 하는 부처의 마음이라고 해석한다. 아난은 지역정서까지도 공유한 필링으로 부처의 말을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가섭은 똑똑했지만 이 부분에서 밀린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각묵의 설명이 맞다면, 석가는 지역감정을 조장한 한 원조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 지역감정에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시키고 인간이 인간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라는 원초적인 주제가 맞물려 있다. 부처는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자기가 뭐라고 말하면 제자들은 그것을 과잉해석한다. 혹은 자기는 이런 말을 했는데, 대중들에게 전달된 걸 여론조사해보니 엉뚱한 소릴 하고 있다. 이런 소통에 대한 불안, 소통에 대한 갑갑함. 그런 느낌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신문사 편집국장도 높은 자리다. 어느 날 지면에 나온 보라색의 그래픽이 너무 천박해보인다고 말했더니, 이후 신문에선 아예 보라색은 눈에 띠지도 않았다. 알아보니, 새 편집국장은 보라색을 싫어하니 절대로 쓰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갔다고 한다. 국장은 기가 막혔다. 다시는 편한 마음으로 자기 견해를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토로했다. 부처도 이렇지 않았을까.

여시아문은 바로 이 소통의 문제를 간명하게 환기시키는 대목이다. 아난의 귀에는 부처의 말이 이렇게 들렸다. 아직도 1%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는 겸허함과 지적 엄격함이 깔려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불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일종의 학문, 혹은 학문의 태도를 가르치는 오래된 교육이 아닌가. 내가 완전하게 말해줄 순 없다. 내 귀에 들린 부처의 진실을 바탕으로 나머지는 그대가 궁구하라. 여시아문을 곰곰히 생각해보라. 최소한 아난 정도라면 부처를 제대로 이해했을 지도 모르는데도 거기에도 아직 <부처는 이렇게 했다>라고 확언하지 않는 태도의 의미를.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주제와 한 갈래 닿아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금강경 제 1장 제 1절은 시시하다. 시시해도 너무 시시해서 처음에 읽었을 때는 당혹감마저 들었다. 세상의 모든 굳은 거짓들을 타파하는 한 진리를 기대하고 있던 귀에 시시콜콜해보이는, 전혀 대단하지 않아 보이는 부처의 하루 일과가 공개된다. 워낙 유명한 귀절이니 이 부분은 전부를 인용해보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슈라와스띠의 제따 숲 급고독원에 많은 비구들과 함께 머무셨나니, 1250명의 비구들과 많은 보살 마하살들과 같이. 그때 참으로 세존께서는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시고 가사와 바루를 수하시고 슈라와스띠 큰 도시로 탁발을 위해서 들어가셨다. 탁발을 마치신 후 공양을 드셨다. 공양 후에는 탁발로부터 돌아오셔서 바루와 가사를 내려놓으시고 두 발을 씻고 미리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가부좌를 결하고, 곧게 몸을 세우고, 앞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서. 그때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나아갔다. 나아가서는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인사를 드리고저 세존을 오른쪽으로 세번 돌고서 한쪽 곁에 앉았다.>

이 대목은 부처가 제자와의 대화를 통해 대중을 일깨우는 강의를 하기 전의 하루 움직임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어떤가. 감동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명민한 안목이라고 자랑할만 하리라. 내겐 어린 시절의 그림일기처럼 뭐하고 뭐하고 뭐하고 발씻고 나는 잤다는 형식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쨌다고? 이런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러나 이런 부처의 일상을 담담하게 공개하는 것은 공부를 마음자리를 까는데 참으로 중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부처는 특별하고 대단하고 귀하여, 중생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인식, 이것이 가르침의 출발이다. 최소한의 소박한 구도자의 삶이 이 귀절에는 모자람없이 기술되어 있다. 구걸을 나서기 전의 모습과 구걸을 다녀온 뒤 모습의 평화로움과 단정함. 이것은 곰곰히 생각하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만을 갖추고 나머지는 오로지 공부에 매진해온 그였으리라. 그에게는 이 가르침을 전한 이날 하루도 그 공부의 알뜰한 과정이었다. 그리곤 자리에 앉았다. 수많은 불상들이 취한 자세, 가부좌에 곧게 허리를 편 모습으로. 그리곤 생각들을 가다듬는다. 각묵은 이, 생각을 가다듬는 행위에 밑줄을 친다. 그걸 원어로는 사띠(마음챙김)라 부른다.

금강경에 공개된 부처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귀한 깨우침이다. 무엇이 삶에 중요한가. 이것을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석가가 부족함 없는 일국의 왕자로서 삶 의 회의를 품고 나섰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는 왜 가출했을까. 도대체 나는 무엇이며 왜 사는가. 이런 단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구도는 이런 질문에 대한 집요하고 치열한 궁구였으리라. 존재의 비밀에 치중했더라면 그는 진 짜 종교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신처럼 행동하며 폼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는 살아가는 일의 의미에 대해 더 마음을 두었다. 태어난 것의 가치. 살아가는 것의 진 정성. 그게 더 궁금했다. 그래서 불교는 종교가 되지 못하고, 아주 깊고 집요한 학문의 분위기를 띠게 되지 않았을까. 불교가 현세에서의 복락을 기구하는 종교로 인식되고, 혹은 죽어서 극락가는 방편으로 이해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처에 대한 모독이며 부처 가 그토록 우려하던 소통의 오해가 깊어져도 한참 깊어진 결과이다. 각묵이 '사띠'라는 말 하나에 목청이 우렁차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씹을 수록 환해지는 말이니, 일부를 베껴보자.

"북방불교, 즉 대승불교에서 초기 불교 술어들을 이해할 때 가장 잘못 이해하거나 소홀 히 다룬 술어가 바로 이 사띠라 하겠다. 이 중요한 술어를 단순히 '기억'이나 '생각' 정 도로 이해한 것 같다. 그래서 초기 불교 수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아니 불교 수행의 전부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용어를 오해 내지는 쉽게, 아니면 간단하게 취급해버린 것 같 다. 그래서 8정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념(正念,바른 마음챙김, 삼마사띠)이 대승불 교의 실천도인 6바라밀에서는 상실되어 버리고 대승불교 수행의 어느 곳에서도 정념은 강조되지 않는다. 현대의 일본 불교학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학자들도 정념을 '바른 기 억'정도로 번역하고 넘어가 버린다. 북방에서 이 사띠를 잊어버렸다면 남방은 어떠한가 ? 남방에서도 위빠사나라는 테크닉을 지나치게 강조하여서 위빠사나가 다름 아닌 사띠라 고 역설하다 보니 정작 이 사띠를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역자는 보고 있다. 북방에서는 화두라는 테크닉, 남방에서는 위빠사나라는 테크닉을 중시한 테크니션들이 테크닉을 넘 어서 근본 수행법으로 제시한 이 사띠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테크닉으로서가 아닌 도 (道), 저 8정도로서 수행을 파악할 때 근본 불교의 수행은 전개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사띠가 뭐길래. 마음챙김이 뭐길래 저렇게 각묵이 남북방 불교를 한입에 성토하 며 강조를 하는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인다. 부처는 수행을 통 해 당대 인도 정통파 수행자들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경지를 마스터하고도 마음이 허전했 다. 그래서 그는 고행을 떠난다. 고행자의 전통에 따라서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다 당 한다. 그러다가 목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이걸론 안된다고 마음을 바꾸시고 어린 시절 시 골에서 좌선(坐禪)을 할 때의 행복한 경험을 떠올려 편안히 앉아서 명상에 들어갔다. 바 로 이 단계에서 깨닫는 진리가 바로 사띠란 것이다. 수행과 고행엔 테크닉은 있지만 사 띠가 없다는 게 깨달음의 핵심이다. 마음이란 챙기지 않으면 뭔가가 속이고 빼앗아 가져 가버려서 걸리지 않는 진짜 마음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불교수행은 이 잃어버리기 쉬운 마음을 단속하고, 혹은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행위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사띠에 관련한 생각이다. 속이고 빼앗아 가져가버리는 그 몹쓸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바른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 부처가 그 오랜 닦음을 통해 마침내 도달한 깨달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금강경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혹자는 생각할 것이다.

금강경 첫 귀절을 놓고 이렇게 장황한 썰을 풀다니 도대체 언제 끝귀절을 구경하게 될 지 걱정스럽다고. 옛날 고교시절 내 영 문법은 대명사형에만 귀재였다. 책을 늘 첫장만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명사만 능통해지고 , 명사부터는 깜깜한 이상한 편식현상이 생겼다. 동사나 형용사는 절벽이었다. 이런 얄 궂은 어리석음을 여기서도 되풀이 하려는가. 그런 건 아니다. 중국 선종은 금강경이 검 인정교과서이다. 많은 선사들은 부처님이 아침에 의발을 수하고 걸식하고 돌아오셔서 발 을 씻고 자리에 앉으셨다는 이 경지야 말로 최고의 경지요 최고의 설법이라고 감탄해 마 지 않는다. 금강경은 이것으로 다 강의했다고 푼다. 다음 귀절부터는 볼 것도 없다는 생 각이다. 저 평범 속에 깃든 선경(禪境)을 굳건히 이해하는 것으로 진리에 닿을 수 있다 고 믿어왔다. 그러니 그들의 믿음대로 하자면 나 또한 <대명사 통달 영어>로도 금강경을 벌써 일별한 셈이 된 게 아닌가. 마음을 잘 챙겨라. 이 한 마디만 기억해도 금강경의 감은 잡은 셈이라고 각묵은 얘기해주지 않는가. 이 감마저도 못잡은 어지러움이 불교판 에 난무해온 걸 보면 정말 그렇다.

금강경은 수보리라는 부처의 제자가 질문한 것에 대해, 부처가 답하고 되묻는 대화형식 으로 되어 있다.32장 2절로 구성되어 있지만, 다 한 말씀을 강조하고 첨언하고 각인시킨 거라는 게 각묵스님의 주장이다. 한 말씀이 뭔가? 아까 마음챙김을 하는 방법에 대한 귀띔이다. 수보리는 묻는다. 발심한 보살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합니까. 수행을 한 선배 로서 부처가 해줄 수 있는 말씀은 뭡니까. 그런 질문에 대한 부처의 대답은 "산냐를 세 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산냐가 뭐길래? 산냐에 대한 열거와 사례와 위험과 그것을 극복 하는 것의 어려움과 가치를 역설하는 것이 금강경에서 부처가 하고자 하는 말의 대부분 이다. 그러니 금강경을 읽으면서 사띠와 산냐 이 두 마디만 중얼거려도 공부는 하고 있 는 셈이다.

산냐는 함께(with, same)와 아는 것(to know)의 합성어이다. 함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 공통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같은 종류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칸트가 고민했던 범주 (카테고리)라는 개념이 이 산냐와 일정하게 통한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고 호칭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생각을 펼쳐갈 때는 반드시 이런 묶음의 방법을 활용하게 되어 있다. 꽃을 꺾지 말라고 써놓은 화단의 표지판을 보자. 꽃이라는 보편 개념이 없었다면 튜울 립, 개나리, 철쭉, 장미, 백합 등등 그 꽃밭에 피어있는 모든 꽃들을 거론해야 했을 것 이다. 그러나 꽃이란 한 마디로 충분하다. 꽃은 아름답다고 말할 때, 이 보편적인 명칭 이 없었더라면 같은 말을 하기 위해 우린 식물도감 반권의 꽃이름은 읽어야 했을 지 모 른다. 그래도 저 꽃이란 한 마디보다 꽃이 덜 담겨있다. 이것이 보편화의 힘이다. 산냐 의 유용성이다. 그러나 이 지혜는 곧 인간의 인식을 교란시키고 고착시키고 집착하게 하 는 거머리같은 존재가 된다. 볼까?

산냐의 제 1호는 '나'라는 산냐이다. 내 이름을 모욕했다고 나는 화를 낸다. 옛 유럽에 선 그런 이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결투를 신청하고 기꺼이 목숨도 버렸다. 이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은 지금도 없지 않다. 도대체 이름이 뭐길래? 그것은 '나'라는 존 재에 대해 잠시 겹쳐진 기표일 뿐인데.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되었는가.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게 금강경의 주제, 혹은 부처의 이야기다. 이름 뿐인가. 나라는 것의 몸 뚱이, 이건 진짜 나인가. 컴퓨터에 아이디로 쓰고 있는 건 이건 진짜 나인가. 내 몸의 일부, 이를 테면 내 입이라든가 성기라든가 이런 욕망과 얽힌 기관들은 과연 나인가. 이 것들에 대해 내 마음이 그렇듯 평생 노예로 사는 이 삶이 과연 진짜 삶인가. 이런 생각 을 해보란 얘기다. 그것이 '나'라는 산냐이다. 나는 영원히 존재하는, 불변의 '나'가 아 니다. 그저 잠깐 몸을 빌린, 혹은 공간을 차지한, 혹은 깜박거리는 목숨을 부지한, 혹은 이 생각 속에 나비인가 나인가 헷갈리는 그런 알쏭달쏭한 무엇으로서의 '나'이다. 그걸 왜 그렇게 꽉 쥐는가. 나를 움켜잡고 나를 자랑하고 나를 사수하고 나를 이해시키려 들 고 도대체 왜 그러는가. 그걸 알 수 없다. 그런데 부처는 그게 산냐 때문이란다. 나라는 것에 상(相)을 세웠기 때문이란다. 나라는 것에 상(想)을 부여하기 때문이란다. 금방 썩어들어갈 몸뚱이를 잠깐 빌리고 산다는 말이 과장없는 직설인데도 이런 말을 하면 사 람들은, 도사같은 소리한다고 오히려 나무란다. 왜 그럴까. 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자 기에 대한 애착. '나'라고 이름지어지고 나라고 분류지어지고 나라고 개념지어지는 것에 대한 끝없는 착각과 헛사랑을 거두지 않으면 영원히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게 바 로 부처의 지적이다.

산냐 제 2호는 바로 '너'다. 황지우의 시집 중에 "나는 너다"라는 제목이 있는 걸 보면 기분이 묘하다. 나는 네가 아니다. 그와 함께 너도 내가 아니다. 나와 남. 이 분류가 삶의 모든 풍경이다. '너'를 나는 아는가. 넌 누구인가. 넌 무엇인가. 넌 왜 거기 있는 가. 넌 왜 다른 무엇이 아닌가. 내가 알고있는 너, 내가 사랑하는 너, 내가 미워하는 너 , 내가 죽이고 싶은 너, 내가 살리고 싶은 너, 내가 늘 생각하는 너, 내가 버리고 싶은 너, 내가 잊어버린 너, 내가 잊지 못하는 너. 바로 그 '너'는 진짜 대상이 아닌, 진짜 '너'가 아닌 산냐너울을 쓴 너일 뿐이다. 너에 대한 내 고집을 붙잡지 않는 마음, 너에 대한 망념을 붙들지 않는 마음. 너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과 인상과 오해를 그렇게 천금 처럼 붙들고는 우린 살아간다. 도대체 너는 뭐냐. '나'가 내가 아니듯 '너'도 네가 아니 다. 나를 열어두었듯 너를 열어두는 그 헐거운 인식의 경지. 그 열린 관점과 견해. 그것 이 바로 '너'라는 산냐를 극복하는 길이다.

산냐 제 3호는 공동체에 대한 '산냐'이다. 중생상(相)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사 람들을 보는 내 관점. 세상을 보는 내 견해. 국가나 마을이나 단체를 보는 내 편견과 취 향과 고집들.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전쟁을 하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뺏고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종교란 명분으로 테러를 벌이기도 하고 축구경기에 졌다 고 관중들끼리 패싸움을 벌이고 어떤 가문에 대한 다른 가문의 미움이 가보처럼 전해 내 려오는 따위. 이 지역 사람이 저 지역 사람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따위. 이 모든 것들 은 바로 자기가 속한 무엇과 아닌 무엇을 가르는 산냐, 혹은 집단에 대한 온갖 망념들이 집착을 부른 탓이라고 부처는 갈파한다. 그리하여 말한다. 이 모든 갈등과 어지러움과 분열과 광기를 극복하는 길은 바로 '산냐'를 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렇게 산냐는 무섭고 광범위한 인류불행의 단초이다.

산냐 제 4호는 모든 목숨붙이에 대한 집착이다. 목숨을 가진 게 인간 만이 아니고 짐승 도 있고, 식물도 있고, 또 돌이나 물 또한 그것이 한 형상을 유지하는 기간 동안 수명을 가진다. 그런 온갖 미물에 대한 집착과 망념은 사람에 대한 생각 못지 않게 인간을 뒤 흔들고 혼란스럽게 한다. 영화라는 문명의 이기는 인간을 그럭저럭 즐겁게 해왔지만, 영 화라는 것이 뿌려주는 산냐는 또한 얼마나 많은가. 영화 자체도 하나의 산냐다. 자살을 그린 음악을 듣고 혹은 영화를 보고는 수백명이 동반자살한다. 영화 <글루미선데이>는 그런 영화였고, 그런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기도 했다. 인간이 인간 외물에 게 얼마나 치명적인 산냐를 제공받는가를 말해주는 역설이다. 연암 박지원이 하룻밤에 아홉번 강을 건너며 물살의 공포에서 헤어났다는 글을 쓰고 있지만, 그 또한 인간의 인 식을 교란시키는 산냐의 직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려놓은 단적인 예다. 불국토건 설을 외치며 큰 절집을 짓느라 욕심을 태우고 그걸 자랑하려는 마음은 이 수자의 산냐에 서 벗어나지 못한 어리석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모든 목숨붙이에 대해 인 간이 가진 산냐들을 다 걷어내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또한 얼마나 필 요한 일인가. 부처가 예거한 산냐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 숨을 돌린다.

그러나 물론 끝난 건 아니다. 가장 지독한 산냐는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바로 부처가 하고 있는 이 가르침, 즉 불법(佛法)의 산냐이다. 부처의 철저함은 이런 데서 돋보인다 . 그 모든 것이 다 산냐로 뒤엉켜 있는데 오로지 내 말만은 그런 산냐가 완전소독되었을 리 없다는 통찰이다. 나를 죽이라. 내 말을 죽이라. 내 말의 산냐를 걷어내는 일이야 말로 어쩌면 너희가 가장 유념해야할 마지막 공부인지 모른다. 그런데 실제론 어땠는가 . 부처의 말은 허황한 공안으로 떨어지고 벼락득도의 화두를 붙들고 부처의 진의를 멀찍 어 벗어나 골짝골짝의 망념들로 빠져들어간 불도(佛徒)가 부지기수 아닌가. 모든 산냐를 척파하고 잘라낼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칼인 이 금강경마저 제대로 파악을 못해, 이걸 가지고 주문이나 외고 복락이나 빌고 지옥에 안가고 천국가는 티켓 쯤으로 생각하는 산 냐더미가 얼마나 많은가. 내 얘기 아니다. 나는 이런지 저런지 잘 모른다. 각묵의 주장 속에서 발견한 그림이 그렇다는 얘기다. 불가에서 전해내려오는 원효스님과 아들 설총 의 대화는 이 산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설총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 가르침입 니까?" 원효는 대답했다. "좋은 일 하지마라." "그럼 나쁜 일을 하라 말입니까?" "나는 좋은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는 나쁜 일을 생각하고 있구나." 병상에 죽어가는 왁 깔리라는 한 비구를 찾아가는 세존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해준 설법은 이것이었다. "그만 하라. 왁깔리여. 이 더러운 몸을 봐서 무엇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 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부처는 니밋따에 머물지 말라고 말한다. 소위 겉모양이다. 문명이 하늘을 찌를 만큼 진 보를 거듭했다곤 하지만, 이 겉모양 산냐는 인류를 집어삼킬 만큼 왕성하게 번식하고 있 다. 이젠 내면이 드러난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조차도 하나의 기이한 우스개처럼 되어 버린 상황이다. 겉모양이란 산냐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허황됨의 표본이다. 그러나 이 문 명은 그 산냐덩어리를 기꺼이 예찬하며 그것을 인간보다도 더 윗길에 놓는 기괴한 진보 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인간을 즐겁게 하고 이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산냐는 인간삶의 참모습을 깨닫는 능력과 참 즐거움을 구가하는 순정한 인식을 잠식하는 치명적인 종양같은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 주변을 둘러보라. 저 들끓는 니밋따 산냐들을 살펴보라. 곰곰히 생각해보라. 무섭고 섬뜩하지 않은가.

부처가 금강경에서 내 가르침마저 비워버리라고 말했더니, 뒷사람들은 "아, 금강경의 핵 심은 바로 저 비워버리라는 말이구나"라고 파악을 하고는, 비울 공(空)자 한 자를 붙들 고 고민해왔다. 각묵은 이쯤에서 다시 말한다. "거듭 분명히 해야할 점은 금강경은 산냐 를 극복하는 것을 설하였지 산냐 없음에 몰두하라는 것을 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자는 이런 금강경의 말씀을 공(空)이라는 거창한 명제로써 설명하는 대승불교적인 관 점을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이라 간주한다. 금강경은 공을 설하신 게 아니고 초기 불교에서 부처가 고구정녕히 설하신 '산냐를 극복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경이다."

3.

곰곰히 생각할 여유가 생기지 않아, 이 글쓰기를 미뤘던 가운데서도 '엄청난 취착과 갈 애'란 말을 중얼거렸다. 엄청난 취착과 갈애. 금강경을 설명하신 각묵스님의 이 말이 가 슴에 와닿았던 모양이다. 산냐에 빠지지 말라고 역설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것에 빠지 지 않는단 말인가. 그럼 꽃을 꽃이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인가. 꽃을 꽃이라 생각하면 벌 써 산냐가 아닌가.

섹스를 생각해보자. 섹스도 산냐덩어리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몸이 여물게 되면 자연스 럽게 이성에 목마르게 된다. 두 개의 요철(凹凸)로 된 생리적 구조물이 상부상조하여 어 떤 기쁜 느낌을 찾아내는 프로세스 만으로도 섹스는 생명의 중요한 활동이지만, 거기엔 우리가 결정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목적이 있다. 그 행위를 통해 후세를 생산하고 대를 이어 우주라는 생명공간을 영속시키는 작업이다. 섹스를 하고싶어하는 욕망은, 인간의 시선으로 보자면 단견의 목표이지만, 좀더 넓은 시야로 보자면 생명 활동을 관리하는 수단이다. 인간의 수단이라기 보다는 조물주의 수단이다. 그 수단을 통해 이루려는 것은 생명체인을 계속 잇고자 하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인간도 자식에 대한 욕망과 영속성에 대한 갈구를 갖지만, 그 전체적인 우주관리의 시야에서 보자면 아주 좁은 단편일 뿐이 다. 섹스란 인간이 전체적인 통찰을 하기 어렵도록 고안되어 있는 무엇이다. 그냥 알 수 없는 눈먼 욕망에 따라 행위하다 보니, 결국 우주적 질서에 기여하게 되어 있는 일이다 . 하다보니 애가 생기고 그러다보니 세상이 굴러가는 셈이다. 인간을 욕망이라는 맹목으 로 태엽을 감아준 뒤 그것이 자동으로 돌아가기를 조물주는 기다린다. 대부분은 저절로 돌아간다. 그러면 조물주는 그 결과로 일어나는 과실인 추가적인 조물행위를 인간의 몸 을 통해 지속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 깃든 신의 행위가 바로 섹스인 셈이 다.

그런데 이 욕망은 수많은 사회적 금지를 만난다. 이러이러할 땐 섹스를 해선 안된다. 인 간의 법률이나 도덕률은, 네가티브 방식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럴 때 빼곤 섹스를 하면 처벌받는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또 섹스 자체의 결합 강도를 높이기 위해 조물주의 입장에서 고안된 본능적인 '금지'도 존재한다. 섹스와 관련된 유혹들은, 그것을 단숨에 실현시키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어서, 그 갈증의 에너지를 강화시킨다. 예를 들면 여자 들은 자꾸 도망가고 남자들은 붙잡으러 다닌다. 그 긴장된 장력 속에 에너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앞의 금지와 뒤의 금지는 상당히 다른 것이지만, 어쨌거나 이 모든 금지는 섹 스에 대한 욕구의 에너지를 키우고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기여해왔다. 이 금지들과 그 금 지에 따라붙는 상상력과 과장들의 틈바구니에 섹스는 그야 말로 번뇌의 상징이 되었고,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교란시키는 무엇으로 이해되어 왔다.

섹스라는 산냐는 사람을 혼란시키는 으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인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부부라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섹스단위는, 그 혼란스러움을 단순화하여 지키려는 인간 나름의 지혜이다. 신은 이런 고정된 짝으로 섹스와 사랑을 설계해놓지 않았다. 오히려 섹스를 단조롭게 만드는 일련의 굴레들을 조물주는 원하지 않는 듯 보이 기도 한다. 그런 단조로움이 욕망을 약화시키는 점에서보면 그렇다. 신에 대한 위반과 인간에 대한 위반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이 인식의 갈등이 섹스의 산냐를 키워온 것인지도 모른다.

섹스는 인간과 조물주가 벌이는 일종의 게임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물주는 인간을 속인다. 참 맛있는 무엇이 있으니 먹어보라고 권한다. 인간은 그말만 믿고 그 사과를 먹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사과를 못먹으면 죽고싶은 마음까지 생긴다. 그런데 신의 생각은 딴 데 있다. 쟤가 사과를 먹으면 또다른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에게 그런 결과를 숨길 필요는 없지만, 또다른 인간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신에게만큼 인간에게도 반드시 흥미있으란 법은 없다. 아무런 맹목적 욕망을 부여하지 않은 채, 아 담과 이브를 신방에 넣어놨더니 반응이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욕망을 주입시키자고 신 은 착안했으리라. 욕망은 가장 물리치기 어려운 조물주의 속임수이다. 생명현상이 있고 몸이 있는 한 그 몸뚱이에 가득한 느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 존재라는 것은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이 온몸으로 전개해가는 매순간 순간의 엄청난 정신현상과 물리적 현상에 바탕한 접촉 과 그에 기인한 거대한 느낌덩어리의 출렁댐이라고, 각묵은 갈파한다. 이 느낌에 대한 엄청난 반응의 용틀임이 인간을 혼란스럽게 한다. 생명현상이 있고 몸이 있는 한 그 몸 뚱이에 가득한 느낌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몸과 마음이 총체적으로 연계된 전기적이고 파동적이라 할 수 있는 느낌들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보통사람에게 생기는데 이것 이 엄청난 갈애(渴愛)이다. 갈애는 취착(取着)을 부른다. 무엇인가를 목마르게 원하는 마음은, 그 무엇인가를 억지로 붙잡고 그것에 빠져버리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가 만들어지는 모습이다. 무엇인가 고요한 것이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출렁대고 반 응하여 마침내 갈애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존재의 모양새를 제대로만 잘 알고 본다면, 그 것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다시 섹스를 생각하자. 처음에 이성에 몸이 닿았을 때의 알듯 모를듯한 쾌감을 생각해보 라. 접촉은 존재를 출렁대게 한다. 몸과 마음이 달아오른다. 하나의 접촉은 또다른, 진 전된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실현되면 다시 출렁거린다. 이 출렁거림은 전기나 파동 처럼 마음과 몸으로 번져나간다. 처음엔 제어를 할 수 있는 규모의 욕망이던 것이 차츰 엄청난 에너지의 갈애로 바뀐다. 더이상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되어버린 첫 마음은 이 윽고 섹스라는 그 행위에 취착한다. 하나의 사이클이 이뤄지고 나면 다시 존재는 다른 접촉과 출렁임을 시작한다. 이때에도 다른 취착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이 마침 섹스를 예거해서 그렇지 인간만사 모든 행위가 그런 갈애와 취착들로 얽힌 다. 바로 이런 과정에서 인간이 들끓는 에너지덩어리로 치달아 스스로를 소모하고 파기 하는 행위로 내닫기 전에, 가는 길목에서 마음챙김을 잘 함으로써 주어진 대상을 평온한 마음으로 살펴서 산냐의 굴레에 휘말리지 말자는 제안을 부처가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이아먼드를 동원하여 잘라내자는 것은 취착으로 치닫는 마음의 뿌리를 잘라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살피는 평정을 유지하자는 금강경의 호소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살피는 일을 금강경은 여리작의(如理作意,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말한다. 위의 저 존재의 굴레(촉-수-애-취-유)를 불교에선 연기(緣起)라 부르는데 저 굴 레를 잘 살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들은 생겨나지 않게 하고 이미 생겨난 번뇌들은 벌이는 작업이 요니소 마나시까라이다. 서양학자들은 이를 지혜로운 주의(wise attenti on)라 부른다고 한다. 두 수행자가 개울을 건너는데 한 처녀를 업어줘야할 상황이 생겼 다. 늙은 수행자가 업고 건넜다. 처녀를 내리고 한참 걸어간 뒤 젊은 수행자가 "그 처녀 를 업었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라고 묻자 늙은 수행자는 말한다. "나는 개울을 건넌 뒤 처녀를 내려놨는데 너는 아직도 지고 있구나." 이 말은 일견 하나의 해프닝처럼 보 이지만 불교의 가르침을 잘 요약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존재는 내려놔야할 처녀처럼 대 상에 취착한다. 이 집착에서 오는 번뇌를 끊자는 게 금강경이다. 처녀를 업기 전과 업고 난 뒤가 똑같아야 그 처녀를 내려놓은 것이 된다. 그 반응의 흔들림과 출렁거림이 번뇌 이다. 처녀를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그 처녀에 대해 쏟는 부질없는 갈애. 그걸 살피고 버려야 한다.

끝으로 갈묵스님이 금강경의 각 귀절을 요약한 제목들을 살펴보자. 산냐로 시작해서 산 냐로 끝나는 이 경전의 흐름을 읽는 것으론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법문을 하시기까지/수보리의 질문, 발심한 보살은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중생제도의 산냐를 세우지 말라, 산냐를 세우는 자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겉모양산냐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를 하라/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가 되었다는 산냐에 빠지지 말 라/ 미래세에도 참된 보살이라면 결코 산냐에 떨어지지 않는다/보살은 법이라는 산냐를 세우지 않는다/위없는 바른 깨달음도 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침 때문에 가능하다/과위 (果位)에 대한 산냐에 집착하지 않기에 성자라 이름한다/수다원은 '흐름에 들었다'는 산 냐를 내지 않는다/사다함은 '한번만 돌아온다'는 산냐를 내지 않는다/아나함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산냐를 내지 않는다/아라한은 '나는 아라한이다'라는 산냐를 내지 않는다/아라한이라는 산냐가 없기에 세존께서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인가하셨 다/ 여래도 법을 증득했다는 산냐를 내지 않는다/불국건설의 산냐를 초탈한 자가 진정한 보살이다/산냐를 여의어서 대상에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자가 참다운 보살이다/산냐 를 벗어나라는 이 가르침의 공덕은 한량이 없다/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곳이 진정한 불국토이다/산냐를 극복하라는 이 가르침이야 말로 진정한 바라밀 법문이 다/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는 산냐를 가지지 말라/세계와 세계를 구성하는 미진이 있다는 산냐를 가지지 말라/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이다 라는 산냐를 가지지 말 라/산냐를 세우지 말라는 이 가르침의 공덕은 참으로 뛰어나다/산냐를 초극하는 이 가르 침은 최상승과 최수승승에 확고부동한 자들을 위한 가르침이다/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 침을 실천하는 미래세의 중생들은 최고로 경이로운 자들이다/산냐를 멀리 여의었기에 제 불세존이다/산냐를 여의라는 것이 제불세존이 설하는 최고의 바라밀이다/산냐를 여의었 기에 참다운 인욕바라밀이다/그러므로 일체 산냐를 버리고서 발보리심하라/산냐를 여의 고 중생의 이익을 위해 보시를 행하라/참다운 법은 진실과 거짓이라는 산냐를 넘어섰다 /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산냐를 여의라는이 가르 침을 듣고 비난하지만 않아도 그 공덕은 아주 크다/ 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침을 수용 하는 자야 말로 진정한 대장부다/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침이 있는 곳이 진정한 불국토 이다/산냐를 버리라고 가르쳐 수모를 받더라도 그로 인해 오히려 업장을 벗고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침을 신해하는 것이 수억의 부처님을 시봉하는 것 보다 수승하다/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침을 들으면 하근 중생들은 마음이 광란하게 된 다/산냐를 가지면 그는 보살이 아니다/깨달은 법이 있다는 산냐가 없었기에 석가모니라 수기를 받았다/여래의 진정한 의미/법이라는 산냐를 여의었기에 일체 법이 불법이다/법 에 대한 모든 산냐를 여의라/불국건설의 산냐를 가지면 진정한 보살이 아니다/제법무아 를 확신하는 자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여래에게는 다섯가지 눈이 있다/여래는 오안으로 중생들의 마음의 흐름을 다 알지만 마음의 흐름이란 산냐를 가지지 않는다/공덕의 무더 기라는 산냐를 가지지 말라/색신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는 견해를 가지지 말라/32가 지 대인상을 구족했으므로 여래라는 견해를 가지지 말라/여래가 법을 설했다는 산냐를 가지지 말라/산냐를 가지지 말라는 이런 법문을 듣고 수승한 믿음을 내지 않는 자는 이 미 중생이 아니다/무상 정등각이라 할 어떤 법이 있다는 산냐를 가지지 말라/무상 정등 각은 꾸살라 담마(善法)에 의해 깨달아진다/복을 감히 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침에 견 주랴/여래가 해탈케 한 중생이 있다는 산냐를 세운다면 그것은 집착일 뿐이다/모양을 떠 나 법으로써 여래를 보라/산냐를 세우지 말라 한다 해서 단멸을 가르친다는 소견을 가지 지 말라/무아를 통달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이지만 굳이 공덕의 무더기를 국집하지 말라/ 행주좌와라는 산냐로 여래를 보지 말라/원자의 모음이라는 산냐를 세워 세계를 보지 말 라/삼천대천세계란 단지 원자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이라는 산냐를 세우지 말라/견 해를 세우지 말라/법이라는 산냐를 일으키지 말고 제법을 알고 보고 확신하라/산냐를 세 우지 말라는 이 가르침의 공덕은 크다, 형성된 것을 떠나 있으므로/ 산냐를 여의라는 이 가르침을 듣고 대중은 환희용약하였다.

어떤가? 이렇게 한 문제를 끈덕지게 물고 있는 경전을 봤는가.
출처 : 초기불전연구원
글쓴이 : 초불 원글보기
메모 : 금강경에 대한 이해를 비유법으로 조금은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긴 글이긴 하지만 계속 공부하고 싶어서 스크랩해왔습니다. 불교에 관심이 깊으신분은 한번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각묵스님과 빈선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기획논단3 -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막연한 중간’이 아닌 ‘바른 깨달음의 길’

초기 경전이 제시하는 중도는 ‘팔정도’

공허한 철학적 사유로 이해해서는 곤란

치우침 없이 총체적으로 실천수행해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緣起)다. 연기는 세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무릇 수행자는 연기적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해탈을 얻는다. 연기적 가르침의 실천은 곧 중도로 연결되는데, 팔정도로 대변되는 중도는 ‘원융과 조화’를 실현하는 첫 단추이기도 하다.

중도(中道)의 가르침은 부처님 최초의 설법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천명하신다.

사진설명: 초기 경전에서 중도는 예외 없이 팔정도다. 부처님은 이 여덟 가지로 구성된 바른 도를 통해 중도를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사진은 청도 운문사의 팔정도 법륜. 불교신문 자료사진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들 두 가지 극단을 따라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다.)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다른 하나의 극단이다.)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게 깨닫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었나니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중도인가? 바로 이 여덟 가지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八正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S56:11)

〈초전법륜경〉뿐만 아니라 37조도품을 중도라고 설하고 계신 〈증지부〉의 한 곳(A.i.295)을 제외한 모든 초기경들에서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이 되고 있다. 물론 37조도품도 팔정도가 핵심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시기 직전에 찾아와서 마지막 제자가 된 수밧다라는 유행승에게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이 없다. 그러나 나의 법과 율에는 팔정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불교교단)에만 사문이 있다”(D16)고 단언하셨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45년 설법의 최초와 최후 가르침으로 팔정도를 설하셨으며 이것이 바로 중도이다. 그러므로 중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께서 초기경들에 정형화해 분명하게 밝힌 팔정도의 정형구를 정확하게 살펴봐야 한다.

첫째, 바른 견해(正見)는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로 정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 〈가전연경〉 (가전연경은 팔정도인 중도를 설한 경이 아니라 중(中)으로 표현되는 바른 견해를 설한 경이다)에서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를 질문 드리는 가전연 존자에게 부처님께서는 “깟짜야나여,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中)에 의지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신 뒤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의 정형구로 중을 표방하신다.(S12:15) 즉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바른 견해이다.

이처럼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연기의 가르침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는 연기의 유전문(고의 발생구조)과 연결되고, 멸성제는 연기의 환멸문(고의 소멸구조)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사성제와 연기의 가르침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을 바르게 보는 것이 팔정도의 정견이다.

둘째, 바른 사유(正思惟)는 “출리(욕망에서 벗어남)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로 정의되는데 불자들이 세상과 남에 대해서 항상 지녀야할 바른 생각을 말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초기경들에서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자애, 연민, 같이 함, 평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四無量)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바른 말(正語)은 “거짓말을 삼가하고 중상모략을 삼가하고 욕설을 삼가하고 잡담을 삼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넷째, 바른 행위(正業)는 “살생을 삼가하고 도둑질을 삼가하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이다.

다섯째, 바른 생계(正命)는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다. 다른 경들의 설명을 보면 출가자는 무소유와 걸식으로 삶을 영위해야하며 특히 사주, 관상, 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된다. 재가자는 정당한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를 실천하는 지계의 생활은 그 자체가 팔정도의 고귀한 항목에 포함되고 있는 실참수행임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여섯째, 바른 정진(正精進)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정진은 해탈열반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선법(善法)과 그렇지 못한 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선법.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것은 결코 바른 정진이 아니다.

일곱째, 바른 마음챙김(正念)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고,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무는 것”이다.

바른 마음챙김이야 말로 팔정도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수행기법이다.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존재를 먼저 몸뚱이(身), 느낌(受), 마음(心), 심리현상(法)들로 해체해서 이 중의 하나에 집중한 뒤, 그것을 무상하고 고요 무아라고 통찰할 것을 설하고 계신다. 마음챙김에서 중요한 것은 해체이다. 중생들은 무언가 불변하는 참 나를 거머쥐려 한다. 이것이 생사윤회의 가장 큰 동력인이다. 무엇보다도 나라는 존재를 해체해서 관찰하지 못하면 진아니 대아니 마음이니 하면서 무언가 실체를 세워서 이러한 것과 합일되는 경지쯤으로 깨달음을 이해하게 되고 이런 것을 불교의 궁극으로 오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되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여덟째, 바른 삼매(正定)는 초선과 제2선과 제3선과 제4선에 들어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삼매 혹은 선(禪)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혼침, 들뜸.후회,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장애들이 극복되어 마음의 행복과 고요와 평화가 가득한 경지를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이 네 가지 선(禪)이며 이를 바른 삼매라 한다.

이상의 정형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몇 가지 관점에서 다시 중도를 음미해보자. 첫째,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도는 팔정도이다.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는 중도하면 팔불중도(八不中道)나 공가중(空假中)으로 정리되는 〈중론송〉 삼제게(三諦偈)를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경에서의 중도는 명명백백하게 팔정도이다. 특히 삼제게는 연기(緣起)적 현상을 공.가.중으로 통찰하는 것을 중도라고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송〉의 중도는 연기에 대한 통찰지이며 이것은 위에서 보듯이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용수스님을 위시한 중관학파에서 주창하는 중도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을 말하는 것이지 팔정도로 정의되는 실천도로서의 중도는 아니다.

둘째, 중도는 철학이 아니라 실천이다. 우리는 중(中)의 의미를 철학적 사유에 바탕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한 설명은 오히려 실천체계로서의 중도를 관념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크다. 중도가 팔정도인 이상 중도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정형구로써 정의하신 내용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에 해당하는 빠알리어 빠띠빠다(patipada)가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a)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셋째, 중도로 표방되는 수행은 총체적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도를 8가지로 말씀하셨지 어떤 특정한 기법이나 특정한 하나만을 가지고 도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8가지가 총체적으로 조화롭게 개발되어나갈 때 그것이 바른 도 즉 중도다. 그러나 우리는 수행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하지 않고 기법 즉 테크닉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그래서 간화선만이, 염불만이, 기도만이, 위빠사나만이 진짜 수행이라고 우기면서 극단으로 치우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중도가 아니요 극단적이요 옹졸한 도일뿐이다.

넷째, 중도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중도는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참선하는 시간이나 염불하고 기도하고 절하는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사찰이나 선방이나 명상센터라는 특정 장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도는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매순간 머무는 곳, 바로 ‘지금.여기(ditthe va dhamme, here and now. 現今)’에서 실천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是現今 更無時節. 바로 지금 여기일 뿐 다른 호시절은 없다)이라 하셨다.

다섯째, 중도는 한 방에 해치우는 것이 아니다. 수행에 관한한 초기경에서 거듭 강조하시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은 “받들어 행하고, 개발하고, 거듭해서 많이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는 팔정도를 많이많이 닦는 것이다. 범부는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 중도인 팔정도를 실천하고 깨달은 분들은 팔정도로써 깨달음을 이 땅위에 구현하신다. 주석서에서는 전자를 예비단계의 도라고 설명하고 후자를 완성된 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중도는 한 방에 해치우는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해서 닦아야하고 구현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직계 제자 때부터 사사나(Sasana. 명령)라고 불렸다. 실천으로서의 부처님 명령은 극단을 여읜 중도요 그것은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닦아서 지금 여기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라’는 부처님의 지엄하신 명령은 저 멀리 내팽개쳐버리고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용해서 자신의 명성이나 지위나 이속을 충족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각묵스님/실상사 화엄학림 교수



[불교신문 2193호/ 1월1일자]
출처 : 초기불전연구원
글쓴이 : 초불 원글보기
메모 : 대구 친구들을 만나서 불교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초기불전연구원까페를 추천해주어서 회원 등록을 했는데 8정도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서 스크랩해 왔습니다. 불교공부에 관심이 있으시면 한번 읽어 보시면 좋을것 같습니다...같이 공부하실까요.... 늘 맑고 향기로운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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