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蓮花)의 계절(季節)

 

 

                                                    2012년 7월 9일

 

 

 

새벽녘의 관곡지

 

지난 토요일, 장맛비 속에 파란 하늘이 보였다.

서둘러 연꽃 만발한 관곡지로 뛰었다.

그런데 생각을 같이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였다.

카메라가 족히 몇 백 대는 되어 보였다.

인파속에 무쳐 연꽃 사진 몇 장을 찍고는 허전한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새벽녘에 하늘을 쳐다보니 달빛이 교교(皎皎)하다.

바로 일어나 일출 시간에 맞추어 다시 관곡지로 갔다.

 

궁궐(宮闕) 공부를 할 때 창덕궁 후원의 애련정(愛蓮亭)에서 주돈이(1017~1073)란 학자를 처음 알았다.

애련정이 그로부터 연유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주돈이의 애련설 (2005년 8월 30일. 호암미술관)

 

그 후, 우연히 호암(湖巖) 미술관에서 주돈이의 작품과 마주쳤다.

 

이층 전시실에 들어서자 맨 먼저 연실(蓮室)이 나오고 대형 연(蓮) 병풍 옆에 주돈(周敦)이의 "애련설(愛蓮設)"이 원문/번역문으로 액자화 되어 걸려있고 미술관 앞에 연지(蓮池)가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술관 주인이 대단한 연(蓮) 애호가임을 느낄 수 있었다.

 

멋모르고 사진을 찍다가 Docent(미술관의 전시품을 설명하는 사람)로부터 곧바로 제지당했다.

그래서 사진의 초점이 흐려졌다.

 

 

 

 

 

 

주돈(周敦)이는 북송(北宋)때의 학자로 주역(周易)을 개념화 하여 국가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다.

연(蓮)을 아끼는 선비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시서화(詩書畵)에 주돈이의 애연설(愛蓮說)을 인용하였기에 번역문을 적었다.

 

 

“내가 오직 연꽃을 사랑함은 진흙 속에서 태어났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올곧은 줄기는 속이 비어 밖과 통하며 덩굴 지지 않고 가지가 없어서이다.

향은 멀수록 맑고, 우뚝 선 모습은 멀리서 바라볼 일이요

너무 가까이 할 수 없으니 연이야 말로 꽃 중의 군자니라! "

 

 

 

 

 

연(蓮)의 꽃말은 "가련한 마음"이다.

이 꽃말이 맹자(孟子)에게 가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요 공자(孔子)에게 가면 인(仁)이요 부처님께는 자비(慈悲),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이라 표현하였다.

 

연꽃은 그렇게 지고(至高) 순결(純潔)한 사랑의 꽃이다.

 

새벽녘 연지에서 아침 해를 맞는다.

개화성(開花聲=연꽃 터지는 소리)은 듣지 못하고 가슴 가득히 연향(蓮香)을 채워서 돌아왔다.

 

 

 

   울산에 계신 이사장님께서 친구 분의 메일을 보내 오셨다. 고맙습니다~~^^

어제 학교 졸업 후 40년 만에 처음 만난 친구와 얼만 전 만난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여고동창 4명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일산 호수공원 안쪽에 있는 연 꿏이 피어있는 연못을 보고 왔는데

그곳의 연꽃은 이미 다 시들어 가고 있어서 연밥만 보고 왔는데...

 위의 메일을 보고 만개한 연꽃을 보니

오래전에 전주 덕진 공원에 가서 본 그 광활한 연꽃단지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아직 시들지 않은 연지가 있다면 한번 찾아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내일 친정 엄마를 모시러 올케와 대구에 다녀올 생각인데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연향 가득한 연 잎차 한잔 건네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늘 맑고 향기로운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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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앙이 좋은 분이 사는 동네가 여름철 큰 장마로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좋은 신자는 집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장마비를 멈추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래도 계속 비가 내려 시에서는 동네 주민들을 피신시키기로 하고 대피 방송을 하였다.

그래도 이 사람은 피신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비를 멈추어 주시든지 아니면 기적을 베풀어 주셔서

자신의 집은 홍수에 피해 없도록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이번에는 시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소방차를 보내었다.

 

 

 

그래도 이 신자는 피신을 거부하고

이번에는 지붕 옥상에 올라가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래도 비는 계속 내려서 이제는 주택들이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에서는 마지막으로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헬리콥터를 보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좋은 신자는 헬리콥터의 구조를 거부하고 계속 기도만 하였다.

마침내 홍수에 집은 무너졌고 이 믿음이 좋은 신자는 물에 떠내려가서 죽고 말았다.

 

이 신자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고,

이 믿음이 좋은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는데 그는 매우 기분이 상해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항의를 하였다.

 

 

“하나님! 하나님은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해 준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지”

 

“그런데, 왜 이번 홍수 때 제가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응답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네가 기도할 때 나는 너의 기도를 듣고 천사들을 동원하여 너를 구조하도록 하였다.”

“아니! 하나님! 저는 천사들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보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보내서 홍수가 나니 피하라고 경고하였고,

 

그래도 네가 순종하지 않아서 그 다음에는 소방차를 보내었고,

마지막으로 헬리콥터까지 보내지 않았느냐?

 

그런데 네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너는 내가 너에게 준 귀한 생명을 잃었고

내가 너에게 준 사명을 감당치 못하고 이렇게 일찍 죽어 여기에  온 것이니라.

 


 모래님의 블로그에서 스크랩 해 온

감동 깊은 글입니다  언제나 멋진 사진과 고운 글 허락하여 주신 금모래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은 전혀 노력하지 않고 신의 이름만 부르고 있으면 결코 살아 날 수 없듯이...

자기 스스로 죽을 힘을 다하여 힘껏 노력하고 최선을 다 할 때 신도 도와 주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성실하게 매사에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노라면 하늘은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신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인도의 라자스탄주 조드푸르시 서쪽 40km 부근에는

현재 인도인들이 가까이 가기를 꺼려하는 죽음의계곡이 존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식물은 물론 어떠한 생물도 살 수 없는 이 계곡을 들어갔던 사람들은

모두 6개 월 이내에 머리카락이 빠지며

원인모를 병으로 사망하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인도인들과

과거에 인도를 지배한 영국인들은

조드푸르 근처 죽음의 계곡을 직접 들어가는 일은 피했다고 합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전쟁을 불사하기 직전까지 갔던 1998년,

UN에서 파견 나온 핵 전문가들은 양국간의 핵무기 사용을 막고

분쟁을 중재키 위해 뉴델리를 방문 하였다고 하며,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인도 정부의 관리로부터

조드푸르시 죽음의 계곡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탐사팀을 구성하여 12000여년 만에 처음으로

방사능 보호 복을 입고 문제의 장소를 방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제의 장소로부터 32km떨어진 조드푸르시의 외곽에서

방사능 오염도를 체크한 UN의 과학자들은

그곳에서 검출된 방사능의 오염도가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여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방사능 측정기계들의

가능한 수치 눈금을 모두 초과하였다고 하며,

현재까지 이렇게 심한 방사능 오염을 본적이 없던 과학자들은

죽음의 계곡을 '과거에 엄청나게 큰 핵폭발이 있었던

미스테리한 지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3만4000년 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인도의 마하바하라타 경에는

죽음의 계곡에 관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알아야 할 이성적 부분이 있고, 믿어야 할 신비적 부분이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한다면 절름발이 신앙이 되고,

어느 것 하나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이성주의 혹은 신비주의가 됩니다.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인간적 요소인 이성과 신적 요소인 신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위의 글은 금모래님 블로그에서 사진과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 중에는 나름 자신의 신앙을 지극정성으로 믿으면서 어떤 성취감을 맛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불교에서도 삼천 대천 수많은 세상이 존재하고 지금도 부처님께서는 도솔천에 계신다고 하지요...

동방에는 아축불이 계시고, 남방에는 보생불이 계시고,  서방에는 아미타불이 계시고, 북방에는 불공성취불이 계시고, 중앙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 계신다고...

 

기독교를 믿는 친구는 누가 집안에 무슨 안 좋은 일만 생기면 종교를 바꾸라고 권하는데... 얼마 전 일본 지진 때 어느 목사가 한 말 때문에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기독교만 공표고 다른 종교는 다 곱표라고 하는 심성을 좀 바꾸어야 되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좋다고 취하고 금방 나쁘다고 버리고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닐진대...

모태 신앙이라 할지라도 커가면서 자신의 이성과 지성으로 판단을 하게 될 것이고, 누구나 다 자신의 종교에 어떤 성취를 맛보고 깊은 깨달음과 느낌이 있기에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고 어쩌면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 심성을 정화하고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근본 취지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구원을 받고... 불교에서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대 해탈을 성취하는....

이론적으로는 잘 알면서도 그동안 살아온 습에 휘둘리어 인연의 고리를 끊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도 오백생을 윤회하시어 성불을 이루셨다고 하는데....

우리네 인생은 얼마나 많은 생을 윤회하고 또 해야 깨침을 얻으려는지...

 

눈 먼 거북이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발견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우리 생에서 불도를 만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생을 지나치면 또 다음 어느 생에서 불도를 만나려는지도 모르는데...

전생으로 부터 이어져온 습을 뿌리치기가, 가위로 끊듯이 끊어 버리기가 쉽지 않음에 요즘 4월 월초 불공을 하면서 더 많이 느끼면서도 마음을 다잡기가 어렵고 잡념만 무성함에 불공을 하는지 안하는지 마음이 복잡하기만 하다.

 

늘 마음이 고요하기를 평화롭기를 서원하건만... 靜香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기만 하다....

마음이 들뜬 날에는 잔잔한 가슴 주시고....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늘 제 블로그를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맑고 향기로운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남자의 인생에는

세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妻子를 위한

굳건한 아버지의 길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지위의

상승과 성공의 길이며..


나머지 하나는 언제든 혼자일 수

있는 자유의 길입니다..
 

 

남자의 인생에는
세 여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내가 닮았으면 하는
어머니이고..

또 하나는 전능한
어머니였으면 하는 아내이며..

나머지 하나는 가슴에 숨겨두고
몰래 그리는 여인입니다..


 
 
 
 

남자의 인생에는
세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을 걸고 싶을 만큼
귀한 친구이고..

또 하나는 고단한 길에
지침이 되어주는 선배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신을 성숙케 하는 책입니다..



남자의 인생에는
세가지 갖고 싶은게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징그러울 만큼
꼭 닮은 아들이고..

또 하나는 죽을 때 까지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며..

나머지 하나는
목숨 다할 때 까지 효행하고픈 부모입니다..
 



남자의 인생에는
세번의 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첫사랑 보낸후 흐르는
성숙의 눈물이고..

또 하나는 실패의 고배를 마신후
뼈 아픈 눈물이며..

나머지 하나는 부모를 여의었을때의
불효의 피눈물입니다....

 

 

오래전에 해바라기님이 보내온 마음을 움직이는 수필중에서 실었습니다.

폭우성 비가 퍼붓다 그쳤다 하는 아침입니다. 비가 오니 좀 시원하긴 하지만...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고 비 피해 없는 고운 하루 보내시기를~~*^^*~~

 

 

 

할말이 없으면 침묵을 배워라|

 

 

할말이 없으면 침묵을 배워라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는 것은

태양을 양쪽에서 쪼이는 것과 같다.
서로의 따스한 볕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성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태양이 되자.
그리하여 영원히 마주보며 비추어 주자. 


그대의 운명을 사랑하라.
어떤 운명이든지 간에

항상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쪽 얼굴은 어둡고 우울하며

다른 한쪽 얼굴은 따뜻하고 밝다.
어두운 얼굴을 가리고 밝은 얼굴을 택하여

그것만을 눈 여겨서 바라보라.
그것이 험한 운명의 바다를 노 저어 가는 항해술이다. 
 
현명한 사람이 되려거든 사리에 맞게 묻고,
조심스럽게 듣고, 침착하게 대답하라.
그리고 더 할 말이 없으면 침묵하기를 배워라.

 
사랑한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 순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만으로 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마음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아픔과
어둠까지도 껴안을 수 있는

넉넉함을 간직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풍요하지 않게, 다복하지 않게 태어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일어난 일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에 있다.

물 위에 글을 쓸 수는 없다.
물 속에서는 조각도 할 수 없다.
물의 본성은 흐르는 것이다.
우리의 성난 감정은 바로 이 물처럼 다루어야 한다.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이 시작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으며 사랑에 대한 순수한 기쁨만으로 충만해 있다.
사랑의 첫째 조건은 그 마음의 순결함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견딘 시련들이야 말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승리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영광의 월계관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물다.
종종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힘은 경험과 역경을 통해서 자라난다.

 

 

 

 

 온 세상이 통곡과 슬픔으로 가슴이 아파서 언제 꽃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를 잔인한 4월을 보내고 있는데....어제는 종일 천안함인양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면서, 조국의 부름에 기꺼이 달려간 젊고 늠늠한 잘생긴 우리아들, 남편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그 가족의 슬픔이 남의 일 같지를 않아서 하루 내내 눈물이 글썽이고 사연 하나 하나 목이 메여옴을 온 국민이 다 느꼈을 것이다.

 

철저한 원인규명을 하여서 다시는 이런 아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부관계자는 샅샅이 밝혀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외부의 어뢰습격으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천인공노할 그 상대자는 마땅히 국제사회의 규탄과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고귀한 희생에 합당하는 보상도 치루어야 할 것이라고...우리 국민은 분개하여 지켜 볼 것이다.

내가 오늘 되로 준 그 고통이나 아픔이 말로 되어서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을 그들은 왜 모르는가.... 

세상사 모든 것이 인과응보인것을....

 

중국에서도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희생자와 실종자가 생기고 멀리 아이슬란드에서는 화산이 폭발했다고 한다.

생노병사 피할 수 없음이 우리네 삶이지만 올해들어서 각종 사건과 지진, 화산폭발, 쓰나미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은 왜인지?

지구는,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경종을 주고 있음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반성의 시간을 가져 볼 일이다. 

 

한 주가 어떻게 지나 갔는지....벌서 또 주말이다. 희생된 모든 분들의 왕생성불을 부처님전에 서원 합니다.....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고운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신 고운 주말 보내시기를~~~*^^*~~~

 

 

 

 

감동의 글]< 읽고 또 읽으며 눈시울을 적신글!>


? 미 백악관  정책 차관보 강 영우 박사의 아내 석 은옥 씨의 고백!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 그의 뒤에는 한평생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 아내 석은옥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 “최고 엘리트였던 내가 앞 못 보는 남자와 결혼,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온 감동 인생 사연” 이제 우리 부부는 인생 육십을 넘겼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년,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그가 평생 단 한 번 걸스카우트를 방문한 그때,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느님께서 내게,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그는 맹학교 중등부 1 학년생이었고, 나는 여대생이었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학생만 힐금힐금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 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이에요”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 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남편은 수년간 방황했다.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처음 만날 때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게 아니어서 남편은 어렴풋이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빛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완전 맹인이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 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2년 정도 지나 그의 성적표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 한 살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친이 안 계신 동생이 생기니 누나로서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누나 동생으로 6년,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하고, 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주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와 만난 지 5 년째 되던 해,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미국 땅에서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 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68년 12월 22일,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 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남편에게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 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 하고 말렸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2월 26일,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맹인 아내로서 내가 겪은 고통 1972년 8월,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그 항목을 삭제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몇 년 동안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피츠버그대학교 9월 학기 개강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한미재단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맹인재활센터에서 일했고, 입덧도 심했다.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온 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싸움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보행훈련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차에 결단의 기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행훈련을 받아도 자주 다니지 않은 곳이나 생소한 지역을 갈 때는 여전히 정안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보행훈련을 받아 나에 대한 의존도가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어린 두 아들을 남에게 맡긴 채 남편의 대학원 강의실을 향해 떠날 때,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강의가 먼저였다. 맹인 아빠에게 젖먹이 아기를 맡기고 도서관에 자료 심부름을 갈 때면 혹시 불이라도 날까 불안했지만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 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다가가 한국에서 유학 온 맹인 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그네를 밀어주던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했다. 과부가 과부사정을 안다고,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그 부부는 우리에게 자기 집 3층을 내줄 테니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어린 두 자녀를 돌봐달라고 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할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집에 살면서 매일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머지않아 박사가 될 남편을 내조한다고 생각 했으며,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주관 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의 식모살이나 하는 처지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오히려 아파트에 살 때보다 더 행복했다. 우리와 처지도 같고 동년배라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둘째 아이 진영이가 생겨 더욱 감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거나 울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맹인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내외는 출세 지향적이 아닌, 성취 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을 느꼈다.

또 쾌락보다는 보람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승리감과 보람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1976년 4월 25일,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 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이란….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물론 아무나 맹인의 아내가 되어 어려운 내조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할 때도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취를 나의 성취로,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학사 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받은 박사학위가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겹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맹인이 어떻게 눈뜬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무직자인 박사 남편, 아직 어린 진석이, 갓 태어난 진영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만료된 유학생비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남편이 포스트 닥터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오도 가도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배수진을 친 남편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오히려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조건으로 바꿔주실 테니 인내하며 좀 더 기다려 봐요.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 몰두하고 직장 찾는 노력이나 계속하세요.” 지금도 남편은 당시 자신의 고통을 함께하면서 그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줄 때가 가장 고마웠다고 말한다. 하루는 나의 격려가 통했는지 남편이 면접을 다녀오더니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기적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면접을 보았지만 번번이 영주권이 없어 채용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단 학생비자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월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인디애나에 도착해 남편의 첫 출근과 함께 나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터리 클럽 회원으로 매주 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병이라도 나서 내가 누워버리면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질 텐데, 다행히도 그런 기억은 없다. 아마도 내조하는 기쁨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보람이 엔도르핀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 남편이 인디애나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던 1987년 9월,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 장님 박사 탄생’,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그때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내용인즉슨, 앞 못 보는 장님이 박사가 되었다기에 기사를 읽어보니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1983년 6월 5일은 남편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등단한 날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1만6000명의 세계 민간 지도자가 모인 단상으로 남편을 안내하는데,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극도로 긴장해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군중의 시선을 볼 수 없어서인지, 그다지 긴장하지 않고 연설했다.  그리고 남편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은 45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500명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으며, 그중 500명은 상원 인준까지 받아 이름 앞에 ‘honorable’이 붙는다. 먼 이국땅에 유학 와서 이민자로 정착한 지 사반세기 만에 남편은 ‘honorable’이라는 경칭이 붙는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가 되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부시 대통령 앞으로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 지 40년,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팀으로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 신혼부부로 미국 땅에 도착할 때 태중에 있던 진석이는 링컨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하버드대 동문이 되었다. 그리고 안과의사의 꿈을 이루어 듀크 대학병원에 근무 중이며,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를 맞았다.


작은아들 진영이는 필립스 앤도버 아카데미 출신으로 부시 대통령 부자와 동문이다. 약관 27세의 나이로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고문변호사이며, 아내 역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이민자로 미국 땅에 와서 교육자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육인명사전, 미국여성명사인명사전에 올라 역사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2003년 5월 29일, 내 생일에 아들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당신 정말 행복하겠소.” 진영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팡이가 되어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며느리들까지 본 어머니로 살아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처럼 선명한 비전으로 내 인생을 인도해 신앙 안에서 명문가를 만드는 동반자가 되어준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위에 글은 보내온 메일인데 그 주인공이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쳐 아래 글을 다시 옮겨 왔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중에 가슴이 뭉클해오면서 세상에 정말 천사같은 여인이 존재함을 알게된 것 같아서 흐뭇하면서도 한편 내조를 잘 하지못한 지난날을 반성하게도 된다.

석은옥여사님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장한 한국의 여인상으로 신사임당이래 이토록 훌륭한 여인이 또 어디 있으랴싶다. 그 엄마를 보고 훌륭히 자라준 두 아드님께도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박사가 되신 강영우박사님께도 박수를 보냅니다~~~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고운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날씨는 추워도 위에 글을 읽으신 마음만은 뜨거운 열기로 훈훈하리라 생각 합니다...맑고 향기로운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안과의사로 변호사로 훌륭하게 자란 두 아들과 함께한 강영우 박사
실제로 강 박사는 198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로터리 세계대회에서 “나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입니다. 실명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실명 때문에 순수한 인간애와 숭고한 봉사정신으로 나의 반려자가 된 아내를 비롯,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인간승리자로 되는 데 필요한 인간천사들도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며 자신의 첫번째 국제무대연설을 했다.

석 회장의 본명은 석경숙이다. ‘석은옥(石銀玉)’이란 이름은 남편 강영우 박사가 1968년 12월 22일 청혼 후 지어준 이름으로 30년 인생계획을 담고 있다.

석 여사와 강 박사가 처음 만난 1961년부터 첫 10년은 맨발로 돌밭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석(石)의 시대, 다음 10년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공통된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은(銀)의 시대, 나머지 10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회에 봉사하는 옥(玉)의 시대를 보내자는 것이다.

1991년 옥의 시대가 끝나고 지금 석은옥 여사의 이름은 ‘석은옥주’다. 1992년부터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의 삶은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사는 주(主)의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30년은 우리들이 계획한 것을 실천하면서 살아왔는데 1992년부터는 우리가 계획하지 않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이름이 석은옥주입니다(웃음)”

석 회장은 2006년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을 창립해 활동하며 주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은 그동안 미국 양로원 정기적 방문, 가정폭력 피해 여성돕기, 한인자녀 장학금 지급, 한인장애인 교육기관·한인여성 셀터제공기관 지원, 한인독거노인 장례금 지원, 한인여성 이민수기·한인 어머니 수기 공모 및 시상, 국제결혼가정 선교회 버지니아 지부 후원 등의 활동을 해왔다.

석 회장은 두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이번 여름에는 할머니로 손녀를 직접 두 교회 여름성경학교에 데리고 다니며 기독교 신앙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도 애쓰고 있다.

“내 스스로에게 기쁜 것은 내 인생에서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한 사람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글에 문제가 있으면 말씀 주시면 즉시 지우겠습니다. 아름다운 사연이라 가족사진과 석은옥 여사님의 사진을 올렸습니다.

          오늘 하루 그님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슈만의 '헌정'곡을 바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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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먼훗날 후회하지 않을 삶을 위하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을 위하여 첫번째 할일 사랑에 송두리째 걸어보기 두번째 소중한 친구 만들기 세번째 은사님 찾아뵙기 네번째 부모님 발 닦어들기 다섯번째 영광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여섯번째 고향 찾아가기 일곱번째 지금, 가장 행복하다고 외쳐보기 여덟번째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 아홉번째 마음을 열고 대자연과 호흡하기 열번째 두려움에 도전해보기 열한번째 경쟁자에게 고마워하기 열두번째 추억이 담긴 물건 간직하기 열세번째 사람 믿어보기 열네번째 다른 눈으로 세상보기 열다섯 마음을 열고 세상 관찰하기 열여섯 친구 모임 만들기 열일곱 낯선 사람에게 말 걸어보기 열여덟 사랑하는 사람 돌아보기 열아홉 단하루,동심 즐겨보기 스무번 동물 친구 사귀기 스물한번 3주 계획으로 나쁜 습관 고치기 스물두번 인생의 스승 찾기 스물세번 큰 소리로 사랑해라고 외쳐보기 스물네번 혼자 떠보기 스물다섯 남을 돕는 즐거움 찾기 스물여섯 혼자 힘으로 뭔가를 팔아보기 스물일곱 일기와 자서전 쓰기 스물여덟 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스물아홉 작은 사랑의 추억 만들기 서른번째 날마다 15분씩 책읽기 서른한번 정성이 담긴 선물하기 서른두번 나만의 취미 만들기 서른세번 용서하고 용서받기 서른네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기 서른다섯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기 서른여섯 건강에 투자하기 서른일곱 악기 하나 배워보기 서른여덟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 서른아홉 고난과 반갑게 악수하기 마흔번째 나무 한그루 심기 마른한번 약속 지키기 마흔두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우기 마흔세번 먼곳의 친구 사귀어보기 마흔네번 서소한 것의 위대함 찾아보기 마흔다섯 자신에게 상주기 마흔여섯 꿈을 설계하고 성취하기 마흔일곱 자신의 능력 믿기 마흔여덟 세상을 위한 선물 준비하기 마흔아홉 잊지 못할 쇼 연출해보기 - 탄줘잉 -

 

 어제는 평생 교육학습을 하는 날이였는데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는 시간 이였다.

침을 사가지고 와서 식구들에게 한번 해 줄 생각이였는데 사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 때문이였다.

자신은 침구사 자격증도 있고 많은 공부도 했는데 이렇게 우리처럼 평생교육을 통해서 알게된 이웃이 갑자기 한밤중에

전화가 와서 좀 와달라고 하여 달려 갔더니 그집 주인이 갑자기 뻣뻣해지면서 정신을 잃어갔다고...그래서 119에 전화를

하라고 하고는 자신은 늘 하던데로 10손가락에 침을 놓아주고 피를 빼주었다는 것이다. 119차가 오기전에 응급처치를 했는데

결국 그분은 병원에 가서 돌아 가셨다는 것인데 후에 가족회의를 하여 선생님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자신은 또 몇가지 다른 사례도 있었고, 자신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알고 있는 기술로 응급한 사람을

늘 하던데로 치료해주고 좋은 일 해 주었을 뿐인데 그 책임을 지라고 하니... 그래서 어제도 부항만 뜨고 사혈은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겁도 많은데 나 자신부터 자신감없이 침을 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쑥뜸을 뜨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뜸뜬 자리가 가렵기 시작하고 좁쌀알같이 돋았다. 식구들은 모두 하지 말라고 ....일주일을 참다가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드니 안좋은 것이 들어난다는 것이고...좀 쉬었다가 계속 하면 좋다고 하신다. 27일 다시 전 선생님이 오시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늘 제 블로그를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이야기씨리즈는 책도 여러권 나왔고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이 기쁨을 헛되이 보내지말고 다시 못 올 오늘을 보람되게 성실하게 내 인생에 다시 못 올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이 보내야하겠지요....

늘 맑고 향기로운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어느 대학교 졸업 식장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효는 백행의 근본임을 알 수 있는 좋은 글을 오랫만에 이사장님께서 보내 오셔서 소개 했습니다.

위에 사진은 서울 근교에 봄이면 눈부신 노란 개나리동산을 절에 갔다 오면서 보살님 차 안에서 찍은 것인데 너무 멀어서 핸드폰으로 찍어서 그런지

사진이 환하질 않네요...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고운 주말 보내셨는지요?

날씨가 좀 흐린 것 같습니다만 이번주가 봄꽃 향연의 피크가 될 것 같은데...가까운 윤중로 벚꽃잔치도 한번 보러 가시고...

고운 한 주 힘차게 열어 가시기를~~~~늘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빌면서~~~*^^*~~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

 

 

 

 그날 아침 집안이 시끄러웠던 것은 청바지 때문이었습니다.

윤희는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청바지를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동네 시장에서 파는 청바지보다 몇 배나 비싼 바지였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윤희는 한참 멋부리는 데 관심을 많

이 가질 나이였습니다. 사실은 그 청바지 자체보다는 브랜드가

더 좋았던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자랑하면서 그 청바지를 입

고 다니는 게 부럽기도 했지만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윤희네 반에서는 요즘 청바지에 붙은 상표를 보는 것이 유

행이었습니다. 이미 같은 반 친구들 중 절반 정도가 이름만 대

면 알 만한 브랜드의 청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윤희네 집안 형편은 어려웠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초등

학교만 간신히 졸업하셔서 변변한 일자리 하나 얻기 힘드셨습

니다. 그래서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온 다음에는 산

동네에 단칸방을 하나 얻어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살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지 못하면서도 윤희에게만

큼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려고 늘 애쓰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윤희는 구김살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고등학생을 감당하기에

부모님의 부담은 너무 컸습니다.

 

 윤희는 절대 1등을 놓치지 않는 등생이었고, 학급 반장까

지 맡고 있었습니다. 얼굴도 예뻤고 정말 가난하다는 것 빼고

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소녀였습니다.

 

 아버지는 고물상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결혼을 늦게 해서

벌서 환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고물상에 실려온 폐지 등을

분류해 트럭에 싣는 게 아버지의 일이었습니다.

 

 윤희는 누구에게도 아버지가 고물상에서 일하신다는 얘기

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도 윤희네 집 사정을

몰랐습니다. 꿈 많은 소녀 윤희에게 가난은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습니다.

 

 청바지 문제가 처음 윤희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 며칠 전이

었습니다. 윤희는 점심시간에 가장 친한 친구 신애와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윤희야, 넌 왜 청바지 안 사니? 동네 버스 정류장에 매장도

생겼더라."

 

 "응, 난 별로 예뻐보이지 않던데, 엄마가 더 비싼 청바지 사

준다고 하셨어."

 

 "야, 좋겠다. 나는 청바지 사는 데도 일주일을 졸랐는데······.

그것도 앞으로 6개월은 아무 옷도 사지 않기로 엄마랑 약속까

지 했는 걸."

 

 드디어 오늘 아침 밥을 먹다가 윤희는 청바지 이야기를 꺼

냈습니다.

 

 "엄마, 내가 전에 말했던 청바지 사줘."

 

 "너 정신이 있니. 어떻게 한 학기 등록금보다 더 비싼 청바

지를 사달라고 하니."

 

 "우리반 애들 다 입고 다녀. 그 청바지 안 입으면 애들이 무

시한단 말야."

 

 "뱁새가 황새를 어떻게 따라 가겠니."

 

 "무조건 사줘. 우리 집 가난한 거 티내고 싶지 않아. 난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난 거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잠자코 아침을 드시던 아버지가 입을 여셨습니다.

 

 "그만해, 여보."

 

 아버지는 옷을 차려 입으시면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셨

습니다.

 

 "청바지 사 입어라."

 

 아버지는 꼬깃꼬깃 접힌 만 원짜리 지폐 여러 장을 윤희에

게 내미셨습니다.

 

 "여보, 그건 당신 자전거 바꾼다고 1년 동안 모은 거잖아요."

 

 "됐어. 자전거야 뭐 나중에······."

 

 아버지는 나가셨고, 윤희도 얼른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신애을 만났습니다.

 

 "신애야, 오늘 수업 끝나고 청바지 사러 가자. 내가 떡뽁이

도 사줄께."

 

 "그래 좋아."

 

 버스가 오자 둘은 버스에 탔습니다. 버스가 한 정류장 지났

을 때 저쪽 편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몇 년째 쓰고 계

신 낡은 모자에 빛바랜 점퍼가 유난히 눈에 띄었습니다. 온 세

상의 짐을 다 짊어지신 듯 힘겹게 낡은 자전거 페달을 밟고 계

셨습니다. 안간힘을 쓰며 오르막길을 오르시는 아버지의 모습

이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버스가 아버지를 앞질러 갈 무렵 낡

은 자전거에서 나는 삐걱대는 소리가 버스 안에까지 들렸습니

다. 이제는 자전거 수리점에서도 더 이상 못 고치겠다고 두 손

을 든 바로 그 자전거였습니다.

 

 자전거 바꿀 돈을 딸의 청바지 값으로 내민 아버지는 또 얼

마나 오래 저 자전거를 타야 할지 모릅니다.

 

 윤희는 그날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아버지 모습이 떠나질 않

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신애

가 윤희의 옆자리로 왔습니다.

 

 "윤희야, 가자. 청바지 사러."

 

 "아니, 안 갈래."

 

 "왜?"

 

 "내일 모레 아버지 생신이야. 청바지 살 돈으로 아버지 선물

살래."

 

 윤희의 머릿속에는 기어가 달린 새 자전거를  보고 깜짝 놀

라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려졌습니다.

 

 

 출처 : 한 달이 행복한 책 (유 린 지음)

 

 

       

 

 

 
 
 
뇌가 건강해지는 10가지 방법
 
 

 

01. 연결시켜 기억하라
정보를 얻고 저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조합이다.
학습능력과 기억력을 좋게 하려면 배우는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만들어주면 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이름을 외울 때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을 처음 만난 장소,
그 장소에서 들었던 음악 소리 등과 연결시켜보는 것이다.
새정보와 이미 알고 있던 정보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겨 또다른 정보가 생겨나게 된다.

02. 양손을 사용하라
뇌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오른쪽 뇌와 왼쪽 뇌로 나눠져 있다.
신체로부터 전달되는 대부분의 정보가 오른쪽과 왼쪽으로 서로 교차돼 전달된다.
왼손이나 왼쪽다리에서 온 정보는 오른쪽 뇌로, 오른쪽 손에서 온 정보는 반대로 가는 식이다.
양손을 사용한다면 뇌를 균형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글씨를 쓸 때 오른손을 사용하더라도 칫솔질은 왼 손으로 하는 거다.
넘쳐나는 정보의 바다속에서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한쪽 뇌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03. 잠자기 직전에 공부하라
꿈은 아직까지 그 본질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동물 실험은 꿈이 우리가 전에 경험하거나 배운 것이나
남겨 둔 문제들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을 반복하도록 만든다.
잠자기 전, 꿈꾸기 전에 외운 것이 더 잘 기억되는 이유다.

04. 외우지 말고 이해하라
인간의 뇌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주변환경에 적응해 살아가기 위해 진화해왔다.
주변 환경을 분석하고 이해하면서 작용하도록 돼 있다.
뇌는 그래서 단순히 암기한 것보다는 이해한 것에 대해 특히 잘 기억한다.
뭔가를 배운다면 이것을 왜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지
뇌에게 잘 "설명"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05. 오래 사귈수록 나쁜게 TV다
텔레비전을 오래 시청하면 뇌에 좋지 않다.
텔레비전은 한꺼번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줘 뇌가 그 정보를 스스로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텔레비전을 오랫동안 보게 되면 뇌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나중에 뇌가 새로운 정보를 능동적으로 얻고 처리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다
. 앞으로 2~3 동안만이라도 텔레비전을 켜지 말고 생활하보라.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겠지만,
얼마 지나면 전과는 다르게 머리가 맑아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06. 일상적인 것에 반대하라
우리의 뇌는 변화를 즐긴다.
틀에 박힌 것은 싫어한다.
단조롭고 변화가 없다는 것은 뇌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뇌는 일상적이고 변화가 없는 정보는 소음처럼 여기고 기억하지 않는다.
가령 여러 권의 책을동시에 읽는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
첫번째 책을 30분 동안 읽다가 이어서 다른 책으로 넘어간다.
교과서를 읽다가 시집이나 재미있는 잡지를 읽어본다.
이렇게 하면 뇌가 집중력을 잃을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07. 여행하라
여행은 뇌를 재충전하고 깨어있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국적인 곳을 여행할 수록 풍부한 자극을 경험하게 돼 더욱 좋다.
여행은 뇌의 환경이 결정되는 12세 전후가 지나기 전에 할 수록 좋다.
새로운 장소나 다양한 인종, 이국적인 음식들을 접하면 뇌의 활동에 도움이 된다.

08. 새로운 것을 먹어라
늘 먹던 음식보다 한번도 먹지 못했던 음식,
예를 들어 인도나 태국음식 등에 도전해보자.
새로운 음식은 뇌에 새로운 자극을 줘 일상생활에
지쳐 있는 머릿속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09. 도전하고 배워라
뇌는 도전을 즐긴다.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거나 글을 써보거나 모형비행기를 조립하는 것 무엇이라도 좋다.

10. 남들따라 하지 말라
뇌는 도전을 좋아하는 동시에 다른 것을 잘 따라한다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뇌가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 하는 뇌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앞으로 20~30년 동안 무슨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할 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정말로 하고 싶은 그 일을 하라. 즐기면서 하는 일은 보상도 따른다.
 
출처 : 카이스트 이수영 교수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고운 주말 보내셨는지요? 새로운 한 주 힘차게 열어 가시기를 바램하면서...

이제 천지에 봄꽃의 향연이 펼쳐지겠지요...

 

세상은 우울한 소식으로 슬픔에 잠겨 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봄의 잔치를 선물합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동업중생의 아픔을 같이 하는 마음으로 천안함과 같은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

운명을 달리한 모든 분들의 넋이 왕생성불 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늘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한 맑고 향기로운 고운 나날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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