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나에 있는 1세기 로마시대에 세워진 아레나 원형 경기장 

 쥴리엣의 집

 들어가는 입구에 가득한 쪽지들

 

  산 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성당 전면에 보이는 그림은 다 모자이크로 된 그림이다.노랗게 보이는 부분은 황금으로.....

 

 곤도라' 푸른 포장으로 덮어 놓았다. 비가 오락 가락 하니까...

 

 멀리 보이는 건강 성당이라고 한다. 흑사병이 돌 때 이 성당을 짓고 열심히 기도하여 물리쳤다고 한다.

 에효 통재라 베니스에 있는 개선문인데...사진이 영...한쪽 꼭대기에는 베니스의 수호신 날개달린 사자가 있고 다른 쪽엔 마가복음의 저자인 수호성인 마가가 있다. 문은 없고 두 기둥으로 된 개선문이라고 한다.

 

 

 

 

 

 

 

 

 

 

 

 

 

 

 

 

 

 

 

 

 안그래도 잘 못 찍는 사진을 수상택시 뒷쪽에서 출렁이면서 밤에 찍은 사진들이라 영 ...ㅠㅠㅠ

      정말 신비하고 아름다운 물에 비친 야경을 표현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너무 크다.

 

 

 

베로나는 중세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도시로 섹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의 배경이 된 도시라는 것과 여름이면 원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여름 오페라 페스티벌'이 유명하다고 한다. 아침 식사 후 로마 콜리세움과 같은 원형 경기장이 베로나에도 있다고 하여 보고나서 쥴리엣의 집에 갔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양쪽 벽 가득히 연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쪽지가 빼곡히 꽂혀져있다. 멀리 보이는 쥴리엣 동상이 있는데 오른쪽 가슴에 손을 얹고 사진을 박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서인지 오른쪽 가슴이 반질반질 윤이 나 있었다.

 

 

 

 

 

 

 

몰의 도시 베니스는 세계인이 제일가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통계에 나와 있다고 한다. 20개 정도의 작은 섬과 150여개의 운하로 연결되어 있고, 이태리어로 베네치아라고 불린다. 이탈리아 반도의 동쪽 아드리아 해의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30만 명이고 9~~15세기에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발전해 왔으며 동양과 서양이 함께 공존하는 도시로 번영해 왔다고 한다.

 

 

 

 

 

 

 

먼저 베니스의 부를 말해주는 산마르코 성당에 갔다. 비잔틴과 서방 양식의 혼합 구조로 1063-1073년에 산마르코의 무덤을 덮는 교회로 세워 졌다고 한다. 황금의 교회로 이름 붙여진 성당으로 르네상스 시대와 17세기에 변형이 가해 졋으며 다양한 양식으로 재건되었는데 특히 대리석과 모자이크의 아름다운 장식이 유명하다. 성당 전면에 그려진 누가성인을 구해온 그림들이나 내부 천정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 황금을 녹여서 유리에 부어 모자이크로 만들어 붙인 그림이라고 한다.

 

 

 

 

 

 

 

얼마나 많은 24k 순금이 그렇게 그 성당을 장식한 모자이크에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그 가격으로 치면 세계 4위 쯤 될것 같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산마르코 성당 앞 산 마르코 광장은 마가복음의 성 마가를 이탈리아식으로 부른 명칭이며 길이 175m, 폭 80m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세계적으로 유명한 광장이라고 한다. 광장 주변에 화랑이 설치되어 있으며 유명한 시인 묵객이 찾아와 한담을 나눴으며 여자를 제일 먼저 출입시켰다는 '플로리안' 같은 유명한 까페와 명품을 파는 고급 상점들이 즐비하다.

 

 

 

 

 

 

 

나는 여기서 카메라 메모리를 구입했다. 아주 비싸게...ㅠㅠㅠ17세기에 만들어진 탄식의 다리는 그 이름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데 총독부가 있던 두칼레 궁과 피리지오니 누오베라는 감옥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한다. 두칼레 궁에서 재판을 받고 나오던 죄수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 세상과 완전 단절 된다는 의미에서 한숨을 내쉬었다하여 탄식의 다리라고...

 

 

 

 

 

 

 

그 유명한 카사노바도 이 감옥에 갇혔다가 나왔다고 하며 카사노바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너무 길어서 다 옮길 수 없지만 처음엔 수도자가 되려고 했던 것과 여자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다정했다는 것과 말년은 작은 성의 집사가 되어서 쓸쓸히 죽었다는 것과 그가 낸 책 '회고록'도 처음에는 금서 였으나 훗날 18세기 유럽의 사회·풍속을 아는 데 귀중한 기록이라고 하여 일반인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쳐 보시면 ....

 

 

 

 

 

 

 

육지에서 3km의 다리를 지나 들어간 베니스의 형성과정과 수상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 설명을 들으면서 현지 가이드가 준비해 온 오래된 항공사진 등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이런 물의 도시를 만들 생각을 했으며 이렇게 잘 살고 있는지 감탄과 신비함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물 밖으로 들어난 길이 보다 더 뻘 진흙층에 깊이 박혀 있을 나무들....어떻게 소금물에는 나무가 썩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며 한 집 당 백여 개의 기억하건데 108개라고 한 것 같은데...기둥 나무를 박고 그 위에 집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신비롭고 아름다운 작은 섬들이 모여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물의 도시를 만들고, 묻 사람들을 출렁이는 신비의 야경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는지... 베니스 대 운하 투어를 하며 돌아오는 수상 택시 속에서 바라보는 물길에 비치는 건물의 네온 불빛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우리 모두를 경탄케 한다. 일행 중 고교생 한명은 "여기서 살고 싶다~~" 고 ...내 맘도 역시 그러하지만...

 

그러나 너무 불편할 것 같아 ㅎㅎㅎ

 

 

 

 

 

 

 

베니스는 가면이 발달했다고 한다. 약간은 부도덕한 동기로....남자들이 전장에 나간 뒤에 집에 홀로 남은 여인네들이 파티 등으로 사교에 나갈 때 자신을 가리기 위한...또한 곤도라가 개인 마차 같은 그곳의 교통수단이 되는 배도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나중에 도가 지나쳐서 행정부에서 모두 검은 색으로 칠 하라는 명령을....또 한편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를 태워 나르기도 했다는데..추모의 색갈로 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검은색갈의 곤도라 뿐 이다.

 

 

 

 

신비한 도시 베네치아를 뒤로 하고 맛있는 식사를 한 후에 호텔에 투숙했다.

 

 

 

 

 

 

*** 이탈리아의 인사말은 ***본 조르노= 오후 5시 이전에 하는 인사

 

 

**보나세라= 오후 5시 이후에 하는 인사

 

 

**고맙습니다= 그라찌에

 

 

**많이 고마울 때= 그라찌에 그라찌에

 

**정중하게 아주 고마울 때= 그라찌에 밀레

 

 

**그냥 편한 만남 인사 안녕=차오

 

 

**헤어질 때= 차오 차오

 

 

 

 

 

 

 

늘 제 블로그를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리면서....

새로운 한주 힘차게 열어 가시고...너무 추운 날 감기 조심 하시고....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 하시기를~~*^^*~~

 

PS; 윗 글은 미리 써 놓은 상태인데 일요일 아침 절에 일찍 가려고 준비 하면서 테레비젼 뉴스를 잠시 들었는데 지금 베니스는 반 이상이 거의 물에 잠겨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내가 베니스를 다녀 오지 않았다면 그런 뉴스는 예사롭게 지나쳤을 것인데... 오후에 딸애랑 큰일이다고 그 아름다운 베니스가 물에 잠겼단다...하면서 걱정을 했다...

 

가이드가 그런 말을 했다. 길가에 널찍한 나무판 같은 것들이 많이 쌓여져 있어서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서 거리가 온통 물에 잠길때 징검다리처럼 그것을 깔아 놓고 밟고 다닌다고... 금 모자이크화로  화려했던 그 성당도 일년의 반세월 이상을 물이 우리 키 높이 만큼 들어 왔다 나갔다 하는 상태에서 그렇게 잘 보존된 것이라고....

 

화장실 사용료가 좀 비싸긴해도 한번 사용에 1.50유로였지만 그래도 이 아름다운 베니스가 물에 영원히 잠긴다면 너무 슬플 것이다 ....절대 그럴일은 없기를....

아름다운 베네치아가 영원하기를~~~~~~ 기원하면서~~~~~♡♥♡♥♡♥♬♪♩

 

 

 

 위에 사진 두점은 금모래님의 까페 사진에서 허락해 주셔서 두점 가져 왔습니다  

 

 

 

웅장한 두오모성당

 

 

 

 

 위에 사진들은 갤러리아 아케이드  제일 번화가인듯..

 

 

 

 

 

스칼라극장 

 

 

 

 

 

 스카라극장

 

 

기원전 753년 늑대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형제 중에 로물루스가 동생인 레무스를 죽이고 자신의 이름을 따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세웠다는 전설을 조각한 것. 여러곳에 이 조각상이 많이 보임.우리나라의 단군신화 같은 것.

 

 

 

 

 

 

 

 

   버스로 4시간을 달려 이태리 밀라노로 이동 중에 가이드는 피곤 할 텐데도 끝없이 이야기를 한다. 이태리에 집시가 많은 이유와 소매치기가 많다는 이야기....그리고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그렇듯이 병원비와 교육비가 무료라고 했다. 그런데 다른 나라들은 자국민에게만 그게 해당이 되는데 이탈리아라는 그곳에 찾아온 모든 이들에게 응급실을 통해서 들어 온 환자는 무료라고 한다. 돌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내치지 않는다는 법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집시가 몰리는 이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차 강조한 소매치기조심을 마음에 심으며 밀라노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웅장한 고딕 양식의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다. " 아! 유럽" 책을 통해서도 읽었지만 그 웅장한 크기는 와서 보지 않고서는 상상이 안가는 크기였다. 안으로 들어 갈 수는 없어도 몇 백 년씩 걸려서 완성 했다는 기록에 수긍이 갔다.

 

 

 

두오모 성당은 3159개의 거대한 조각군으로 장식되어 있고 100m 높이의 유리 첨탑이 하늘로 치솟아 있는데 길이 157m 높이 108.5m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이어 세계 2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1386년 잔 갈레아치오 비스콘티 공작의 명으로 착공 되었으며, 450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어 19c 초에 완공 되었다고 한다.

 

 

 

대리석을 깎아서 건물 외벽은 물론이거니와 그 중간부분과 지붕꼭대기부분 까지도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지나치는 집이나 성들도 모두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다. 루부르에서 만난 비너스나 숱한 조각상들에서 봤듯이 사람이나 동물의 핏줄까지도 살아 움직이는 듯 표현한 그네들의 섬세한 조각기술에 할 말을 잃을 정도라고나 할까....안에 들어 가 볼 수 없음이 안타깝지만 발길을 돌렸다.

 

 

 

두오모 성당의 웅장한 모습을 뒤로 하고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갤러리아 아케이드에 갔다. 1865년부터 13년간에 걸쳐 1877년에 완공된 아케이드로 이태리의 통일 기념을 위한 대표적 건물이라고 한다. 유리로 장식된 높은 돔형의 천장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바닥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자이크 바닥에는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 같은 늑대 젖을 먹고 있는 쌍둥이 그림 모자이크도 있다. 통로 양쪽으로 세계의 명품 상점과 멋진 까페와 레스토랑, 부티크들이 줄지어 서있어서 그런지 사람들도 우리나라의 명동처럼 붐비고 있었다.

 

 

 

현지 가이드 말로는 건축물 돔형 지붕에 최초로 철근을 써서 공사를 하여 미관상 좋지 않다고 그 당시 사람들의 심한 비난 때문에 그 건물이 완성 되던 날 건축가는 2층에서 뛰어 내려 자살 했다고 했다. 사방으로 로마로 통하게 설계한 깊은 뜻이 보이는 멋진 건물 같은데 시대에 따라서 미적 감각이 틀리거니와 또한 너무 앞서가는 재능인을 못 알아 본 그 시대 사람들의 무지 때문에 더 멋진 작품을 남겼을 안타까운 사람을 잃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적인 오페라의 메카 스칼라 극장은 1778년에 세워 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1946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19세기 이후로 푸치니, 로시니, 베르니, 등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들의 작품이 초연되었고,  심플한 외관과는 달리 3,00명을 수용 할 수 있는 내부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으며 화려한 상들리에가 더욱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다고 한다.

 

 

 

오페라 시즌은 12월 초부터 이듬해 7월 초까지이며, 9월부터 11월 까지는 콘서트나 발레가 공연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명훈이 이곳 무대에 섯다고 한다. 아케이드를 지나 지금도 유명한 성악가나 오페라 가수가 서고 싶어 하는 그 유명한 스칼라극장 외부만 관람하고 밀라노에 세계 박람회가 열리고 있어서 호텔을 잡기 힘들어서 로미오와 쥴리엣의 배경 장소라는 베로나에 있는 호텔에 와서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아주 깨끗하고 좋았다. 

 

내일은 조금 일찍 일어나서 이곳에 있는 로마 콜리세움 원형 경기장 같은 베로나 원형 경기장을 둘러보고 세계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한다는 베네치아로 갈 예정이다.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고운 나날 보내시고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 하시기를 ~~*^^*~~~

 

 

 

 

 

 

 

 

 

 위의 사진들은 딸의 핸드폰으로 버스 안에서 찍은 사진들... 역시 한수위의 실력 ^^

 3454M+108M 에 있는 레스토랑 여기서 라면들을 먹는다

 그곳에 있는 우체통 우리도 엽서를 집으로 보냈는데....

 

 

 

 

 

 위에 사진들은 다 협괴열차를 타고 가면서 기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들이라 영....좀....ㅠㅠㅠ

 

 

 

 

 

 

 인공으로 만든 얼음동굴 속에서 항상 -2도를 유지 하기 위해서

뜨거운 공기를 빼내어 다른 곳의 난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대단한 그네들의 기술력...

얼음 동굴 속 생각보다 미끄럽진 않지만 그래도 조심 조심..... 

 

  밑에 내려와서 맛있는 초코렛집에서 쇼핑할 동안 해가 반짝 나면서 융푸라우의 모습이....

멀리 흰눈 덮인 산이 융푸라우라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융단같은 초원과 멋진 산 그리고 호수......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들이 밀라노로 가는 동안 끝없이 펼쳐진다.......

 

 

 협괴열차를 타고 가면서 핸드폰으로 찍은 멀리 보이는 융푸라우....

협괴열차를 타고 가는데 계속 우리를 손짓하는 내가 너무 좋아 하는 산 마테호른이 보여서.....

 

 

   해발 3454M 융푸라우까지 가는데 기차를 두 번 갈아탔다. 노란 기차에서 빨간 기차로 가는데 아침엔 비가 내리더니 산 중턱에서 부터는 눈이 되어 날린다. 모두 창밖의 풍경에 환호하면서 우리들 눈앞에 펼쳐지는 흔히 달력에서 많이 보아온, 먼 산봉우리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고, 산 아래 동네엔 빨간 지붕의 아름다운 집들이 초록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푸른 잔디밭위에 동화책 속 나라 같이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우리가 마치 동화 속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는 착각이 잠시 일어난다. 이곳의 기차레일은 중간에 톱니바퀴 같은 레일이 하나 더 있다. 물론 레일은 모두 겨울에는 열선 처리가 되어 있어서 어지간한 눈은 다 녹아 버린다고 한다. 너무 많이 오면 협괴열차는 운행을 중단한다고 한다. 멀리 창밖으로 내가 그렇게 좋아 하는 산 마테호른도 우리를 따라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아 저렇게 멋진 산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오래 사모한 연인을 만난 것처럼 이렇게 설레이다니...

 

 

 

 

점점 고도가 높아질수록 서서히 고산 증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다들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다.

 

술에 취한 것같이 약간 몽롱하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다. 그래도 일행 모두 전망대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3454m + 108m 올라간 곳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흰 눈 속에 묻힌 도도한 융푸라우는 우리의 때 묻은 발길을 거부하고 있었다.

 

 

 

 

강풍과 눈보라 때문에 아무리 무장을 하고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내 딛고 싶었지만 완강히 우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전날 밤 가이드가 기도하고 주무시라는 말뜻을 그때서야 통감했다. "모두 기도 안 하셨죠" 하면서 다시 여름에 오고 싶다는 일행의 말끝에 여름에 온다고 다 융푸라우의 품속에 안길 수는 없다고 한다. 그렇게 쉽게 오염된 인간을 받아 드리지 않겠다는 융푸라우 앞에서, 순백의 청순한 기로 그동안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아온 내 묵은 때를 이곳에서 정화 시키어 날려 버리고 싶다는 내 욕심이 너무 지나쳤음을 반성했다.

 

 

유럽 최고 지점에 위치한 철도역에는 인공 얼음 동굴과 레스토랑 선물가게까지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곳의 인기 메뉴가 우리나라 컵라면이라고 한다. 그리고 라면을 먹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융프라우에 왔다 갔다는 기념 스탬프를 여권에 찍고, 집으로 엽서를 보내고 융프라우 스탬프를 찍어서 그곳 세상에서 제일 높이 있는 우체통에 넣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엽서는 도착하지 않았다. 물론 그곳의 우표도 붙였는데...

 

 

 

어떻게 보면 악 조건 같은 빙하 설산 속에 굴을 뚫어 산악 열차를 만들고 인공 얼음 굴도 만들고 전망대도 만들어 산악인만이 아닌 세계의 여행객을 불러 모으며, 한반도의 5분이 일의 면적에 인구 720만 명의 작은 국가가 부국이 되어서 잘 살고 있음에 놀랍기만 하다. 천혜의 자연 조건인 알프스의 명봉과 맑디맑은 호수, 뚜렷한 4계절 변화 속 깊은 매력에 세계인들이 달려오는 것 같다.

 

 

 

 

또한가지 깊은 감동은 협괴열차로 올라가는데 우리나라 말로 안내방송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많은 우리나라 관광객이 다녀갔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지만 현지 가이드님들의 노력도 컷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람선을 탓을 때도 한국말 안내 방송이 나와서 뿌듯했는데....우리의 국력이 느껴지고 삼성이나 현대차를 만나면 얼마나 반갑던지...프랑스 최초로 삼성이 번쩍이는 광고판을 번화가에 설치한 장소를 통과 하면서도 감개무량했었는데...

 

 

 

 

영어 불어 중국어 일어 다음으로 나오는 한국어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여행을 다닐 때는 우리나라 말만 써도 전혀 불편함이 없는 그런 세월이 올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 곳 어디를 가든지 다 한국인 점원들이 있어서 쇼핑을 하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렇게 높은 곳에 굴을 뚫고 협괴열차를 만든 스위스국민의 대단한 의지와 기술 앞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조상들의 피나는 땀과 노력의 결실로 자손들은 그 좁은 땅에서 관광사업과 시계 기술로 부국으로 잘 살고 있음에 놀랍고 한편 부럽기도 하다.

 

 

 

 

자꾸만 더 머물고 싶은 융푸라우를 떠나야 할 때 산을 다 내려와서 잠시 쇼핑센터에 지체할 동안 웅장한 융푸라우는 그 모습을 들어 내고 다시 우리들 맘을 카메라의 줌처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 우리 다시 올라가요" 모두들 맘은 다 같은가 보다. 눈도 그치고 햇빛 속에 흰 구름은 산 중턱을 휘감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 표현 할 길이 없다. 초록 융단, 빨간 지붕, 멀리 눈부신 설산, 이렇게 멋진 자연 속에서, 어젯밤 식당에서 연주하고 요들송을 멋지게 부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나이는 들어도 그렇게 넘치는 기로 우리 모두에게 이국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게 해 주셨나보다.

 

 

 

 

요들송에 곁드려 온갖 주변의 소품들도 아름다운 음률이 되는 그곳엔 평생에 한두 번 다녀가는 여행객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주고 싶다는 소박한 착한 마음들이 묻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노후를 연주도 하고 알바도 하면서 건강하게 보내고 계심도 무한한 알프스의 맑고 청정한 기를 듬뿍 받고 살고 계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스에서 이태리로 넘어 오는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산맥을 넘어 오는 눈 아래로 끝없이 펼쳐지는 눈 뎦힌 산봉우리들, 초록 융단, 그 안에 안긴 아름다운 집들, 울창한 사철나무 숲, 그리고 눈이 시리게 푸른 호수까지...이곳의 호수나 강바닥에 석회암이 많아서 물빛이 저리 아름답다고 한다. 지중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기막힌 경치에 더 이상의 탄성도 나오지 않을 만큼 수없이 아름다운 마을들을 지나쳤다. 이번 여행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을 지나 온 것 같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 ....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내면서.... 

고운 나날 보내시고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 하시기를 ~~~~

 

 

 

 

 

 

 

 

 

 

 

 

 콩코드광장의 분수 멀리 오벨리스크탑도 보인다

콩코르드광장 오벨리스크 / 프랑스 파리 시내에 있는 이 광장은 프랑스혁명 광장으로 알려졌으며 이곳에 단두대가 설치되고 처형된 사람이 천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1794년 말경 공포정치가 끝나고 명칭이 콩코르드 광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총독이 루이 필리프 왕에게 3,200년된 룩소르의 오벨리스크를 증정하여 이 광장에 세워졌는데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다. 태양신 신앙과 관계가 깊다고 한다.

 

 콩코드광장 : 차를 세우지 못해서 버스 안에서 찍은 사진

 

 이 거리가 샹제리제거리라고 한다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다 되어 있어서 밤이면 아름다울 것 같다

 

 단지뚜껑같은 이것을 굴리어 소리를 내는데 동전들을 던져주길래 나도 일유로 넣었다

 

 미트퐁듸 메뉴인데 스탠기름솥안에 꼬챙이에 끼운 소고기를 익혀 소스에 찍어 먹는다

 

 

 

  다음날 호텔에서 아침 식사후 개선문으로 갔다. 개선문은 역사적으로 로마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가 이 문을 통과하여 금의환향하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806년에 이 개선문을 건축 하도록 했으나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고 1840년 그의 유해만이 그 밑을 통과 하게 된다

 

1차 대전의 승전행진과 2차 대전 후 드골이 파리 입성을 하여 개선문을 통과하는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개선문 안 바닥에는 전쟁터에 나가 싸운 지명들이 쓰여 있는데 한국 전쟁에 참여한 글도 보이고 무명용사의 무덤에 햇불도 보인다. 안 쪽 벽이나 모든 벽면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보인다. 앞면은 장군들과 그 참모들의 이름이라고 한다. 프랑스말로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는 봉~쥴~~이라고 한다. 고맙습니다는 메르시~ 라고 하고...프랑스의 남성은 수탁 같은 기질이 강하다고 한다. 마치 싸움 닭 같은....사람들이 그리 체격이 커 보이지는 않았다. 마들렌느는 막달리아, 노트르담은 성모마리아. 삐에로는 베드로,라고 한단다.

 

개선문에서 기념 찰영을 한 후에 샹제리제 거리를 배경으로 몇 컷을 한 후에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콩코르드광장을 버스로 천천히 돌면서 오벨리스크탑도 보았다. 샹제리제 거리는 벌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면서 하얗고 예쁘게 장식한 노점상들이 질서정연하게 알록달록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선물들을 팔고 있었는데 밤이면 더 화려하고 고울 것 같았다.

 

점심은 도시락을 받고 12시 58분 고속열차TGV를 탑승하기 위해서 리용 역으로 갔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다. 3시간 50분 걸려서 스위스 로잔 역에 16;52분에 도착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오래전에 뉴질랜드 남섬 갔을 때와 같은 풍경이 펼쳐져서 신기하게 느껴졌는데, 일행 중 한분께서 말씀 하시기를 푸른 초원으로 보이는 것이 다 밀밭이라는 것이다.

 뉴질랜드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양떼들이 보였는데....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기차로 버스로 국경을 통과할 때도 그냥 간단히 그곳에서 나온 사람이 표 검사 정도를 하고 통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편리하고 좋아 보였다. 화폐단위도 같고, 스위스나 영국은 자기네화폐를 고수하고 있지만....로잔 역에서 인터라켄까지 1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가서

 

저녁은 스위스 전통식인 미트퐁듸와 함께 민속공연을 보면서 식사를 했다. 퐁듸는 기름 솥에 우리나라 샤브샤브처럼 약간 도톰한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꼬챙이에 끼워서 익혀 먹는데 처음에는 샐러드가 나오고 여러 종류의 소스에 고기를 찍어 먹는다.

 

민속공연은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나오셔서 요들송도 부르고 아주 길고 큰 호른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런 악기도 불고, 빗자루 모양의 나팔도 불고, 우리네 장독뚜껑 같은 오목한 곳에 동전 같은 것을 굴려서 소리도 내고, 그러면서 좌석으로 오셔서 우리에게도 해 보라고 하는데 그때 약간의 팁을 넣어야 한다. 그 바닥에 동전들이 좍 깔려 있다.

 

곱게 나이 드신 할머니 가수가 3남자의 리더 격으로 사회도 보시면서 우리 팀이 도착한 후에 들어온 일본 여행객과 중국 여행객 중에서 몇 사람을 무대로 올라오라고 했다. 3국의 사람들을 우루루 무대로 불러 모아서 여러 악기들을 연주하도록 하면서 화기애애하고 재밋는 분위기를 연출하시면서 여행객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해 주시려고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연출하시고 노래 부르시는 고운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드셔도 멋지게 살아가시면서 돈도 버시고 얼굴이 평온해 보이는 행복한 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호텔은 정말 아름다웠다. 한국인 부부가 이곳에 여행을 와서 너무 좋아서 그 호텔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오래된 내부를 새로 리모델링해서 계단 층 사이 공간에 작은 테이블과 예쁜 의자도 놓아두고 크리스마스 장식도 해놓고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았다. 서유럽 쪽의 모든 호텔들은 정말 청결해 보여서 좋았다. 아침 식사 때 나오는 빵들도 다 맛있고....저녁에 잠들기 전에 꼭 기도하고 주무시라는 가이드님의 말뜻을 새기며 꿈나라로........사실 시차 적용 때문에 거의 밤늦게 새벽 두시정도에 자고 아침 6시 모닝콜을 해 주는데 눈뜨면 4시 반이고...하루 3-4시간정도만 잔편이라고 해야 하나...

 

내일 융프라우 편을 예고 드리면서....늘 잊지 않고 제 블로그를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12월을 맞아서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에펠탑을 세운 에펠의 밀랍인형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파리시내

 

 

 

 

                  허리가 휘도록 위로 쳐다보고 찍은 사진...^^

 

루부르 박물관 입구 

 

 

 

             가장 완벽한 조각품 스핑크스상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정면 보다는 옆에서 보면 날개가 엄청 크다>

 

 베르사이유궁 조감도

 

 

 베르사이유궁전

 위에 네온빛과 또 다른 야경 무척 아름답다

 

 

 

    인천에서 독일로 가서 독일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하룻밤을 자고나서 시내관광후 해저터널을 통과하는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 북역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잔  다음날 호텔에서 아침 식사 후 에펠탑을 보러 갔다. 세계의 도시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파리 시내는 건물의 높이가 7층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의 날씨는 비가 약간 뿌리다 말다하는 흐린 날씨지만 그리 춥지는 않고 그런 날씨임에도 에펠탑 앞 잔디 광장 공원을 반바지와 반팔 차림으로 남여 노소 구분 없이 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보인다.

 

일찍 서둘러 갔는데도 사람들이 에펠탑에 오르려고 기다리고 있는 줄이 달팽이처럼 꼬여서 길게 서 있다. 여름에는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파리에서 또 다른 현지 가이드가 나오셔서 여러 가지 프랑스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파리에는 개선문이 3개가 있다고 한다. 루브르 박물관과 우 리가 보통 생각하는 샹제리제 거리 앞의 그 개선문과 라데빵스지역에 멀리 사각형으로 보이는 개선문이라고 한다. 그 3개가 일직선상에 있다고 한다.

 

에펠탑을 관광하는데 5명이 넘으면 한 그룹이 되며 그룹별 입장 시간은 1시간이고 예약을 미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프랑스는 한반도의 2.5배

크기로 인구는 약 6천 만 명이라고 한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인 1889년 구스타프 에펠이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세운 탑으로 건립 당시 철골을 그대로 드러낸 외관이 미관을 해친다는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지금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콘트라스트와 우아한 실루엣으로 파리의 상징물이 되었다. 총 높이 약300m로 그곳에 전망대가 있고 1전망대는 57m 지점에,

2전망대는 115m, 3전망대는 274m 지점에 있다. 엘리베이트를 타고 올라가서 파리 전망을 한 눈에 내려다보니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어디를 가거나 돌출된 간판들은 보이지 않아서 더 한층 거리가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정해 보인다고 할까...우리나라의 어지럽고 화려한 네온사인의 그런 간판들은 보이지 않는다.

에펠탑을 걸어서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보인다. 등산처럼...그런데 바람이 너무 심해서....

 

에펠이 자기 자본으로 환갑나이에 이 탑을 세우고 그 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손님도 맞고 1889년에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을 맞아서 상담한 밀랍 인형과, 아들이 없는데 가업을 이은 2째 딸도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 화장실이 있다. 돈은 받지 않았지만 나이 많은 할머니가 그곳의 대장으로 그 할머니가 들어오라고 신호를 해야지 들어 가야한다고...그냥 멋대로 들어가면 혼난다는...

 

그 할머니는 에펠탑 꼭대기 화장실 안에서 무엇을 그리 열심히 적고 계시는지... 사람들 줄이 아무리 많이 기다리고 있어도 장부정리(?)만 열심히 하고 손가락을 빨리 들어오라고 까딱을 않으니 ㅎㅎ 자유의 여신상도 에펠이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에펠탑을 20년 후에 해체를 하려고 계획 했다는데 요즘같이 통신 사업이 발달하니 군사목적이나 여러 가지로 보존하는 쪽으로....

전망대에서도 느껴지는데 에펠탑은 30센티미터가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지럽다....

그 에펠탑이 밤이면 여러 가지 네온사인의 화려한 빛으로 거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점심 식사 후 루브르박물관까지 보았다. 파리의 왕궁이었던 루부르궁은 1793년 프랑스 공화정에 의해 루부르 박물관이 되었으며 현재 총 40만점이 넘는 소장품으로 유럽에서 최고이자 최대 박물관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이집트유적부터 19세기 말까지의 모든 서구 미술품과 종교화 등이 많이 보였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에 대한 이야기도 한참 들었다. 베르사이유 궁에도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이 있는데 다빈치가 사모한 여인의 드레스 색갈이 틀린다는...그래서 찾아보니 역시나...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것이다.

 

대영박물관도 그렇지만 그 방대한 박물관을 한 시간 안에 다 본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스케쥴임에는 틀림없지만 루부르의 백미는 비너스상과 모나리자라고 한다. 현지가이드님의 여러 설명을 무전기로 들으면서 입장표를 끊어 올 동안 잠시 박물관 정원으로 나갔는데 확 트인 넓은 공간은 박물관 못지않게 사람들 발길을 당기고 있다. 시원하게 만들어진 그곳의 경치도 좋아서 모두 사진 찍기에 바빴다.

 

현지가이드님은 핑크빛 도는 화강암의 스핑크스가 가장 훌륭한 조각품이라는 설명도 하고 계단위에 날개를 달고 있는 사모트라케의 니케, 승리의 여신도 비너스 못지 않는 각선미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용감하고 능동적인 ...서양의 남자들은 절대로 여자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도움을 청하면 몰라도...쟌다르크나..니케 조각상을 보아도 그렇고 어쩌면 모계중심의 고대부터의 그런 정신이 심어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비너스상과 모나리자그림 앞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운집해 있어서 감히 접근도 못하고 멀리서 카메라를 잡아 보다가 한 무리 빠져 나간 후에 찬스를 잡아서 여러 컷 찍어 보았다. 모나리자 그림 앞에는 방탄 유리로 전자보완 장치를 해 놓았는데도 3명이나 무장 경비를 서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그 유명한 모나리자의 미소도 흐릿하기만 한데....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그림이 작아서 약간 실망스럽다. 나이 탓인지 잘 안보여서 ㅠㅠㅠ 비너스상 역시 그렇게 완벽한 아름다움을 운운한 조각에서 그 온전한 미를 발견치 못하는 나는 미와는 거리가 먼 문외한 인가보다...ㅠㅠㅠ

 

에펠탑에서 더 우람한 남성미가 느껴졌다면 ...ㅎㅎㅎ 몇 년 전 딸이랑 일본 가서 에펠탑을 본 딴 동경 타워와는 비교가 안 되는 그 거대한 산 같은 에펠탑의 멋진 자태라니...베르사이유 궁을 보고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돌아 올 때 시간마다 그 아름다운 자태의 네온불빛을 다르게 표현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차로 이동하여 베르사이유 궁으로 갔다.

 

1661년부터 1710년까지 50년 걸려서 탄생한 베르사이유 궁은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왕권을 누렸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파리 루부르 궁에 싫증을 느껴 기존 사냥터였던 이곳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방대한 정원을 조성하여 옮겼다는 것이다.

1682년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정치의 수도이자 통치본부였던 이곳은 절대왕권 절정기의 상징으로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마리 앙뚜와네뜨의 침실, 거울의 방으로 불리는 대 연회장...입이 벌어질 정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그 당시의 호사함을 상상해 보면서 기화학적 대칭으로 잘 가꾸어놓은 정원은 바람과 비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모든 천정은 다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잠시 영화를 누리다 혁명으로 처형당한 마리 앙뚜와네뜨는 얼마나 밤새 가슴을 졸였으면 곱던 모습이 하룻밤 동안에 할머니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머리도 하얗게 시어 버리고...부귀와 영화도 다 부질 없음이여 삶의 허무여...

저녁은 프랑스 특식인 달팽이 요리와 함께한 저녁을 먹었다. 우리나라 작은 소라 같은...특이한 푸른빛이 도는 달팽이 소스 국물에 빵을 찍어 먹으라고 했는데, 내 비위에는 그리 썩 맛있지는 않았다. 식사 후에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멀리 노테르담 사원을 보면서 시간에 따라서 바뀌는,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이는 에펠탑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여신의 치마 자락 같은 실루엣을 파리 전체로 어느 곳에서나 보이고 있었다.

 

처음 에펠탑이 만들어 졌을 때 모파상이 제일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고 한다. 흉측스럽다고 그런데 그 모파상이 매일 에펠탑 전망대 식당에 와서 점심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싫다고 하면서 왜 매일 그곳으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파리 시내에서 에펠탑을 보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여기 밖에 없다고 했다고 한다.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미라보 다리 아래도 지나가고...멀리 그 유명한 노테르담 사원도 보이고...

 

에스메랄다를 사모한 꼽추 콰지모도로 열연한 안소니 퀸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 듯도 하다....아름다운 야경을 보면서 우리나라 한강은 세느강 보다 훨씬 더 강폭도 넓고, 깊고, 멋진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느강이 아름다운 건 그 강이 폭도 좁고 물도 깊지 않지만 그 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봐라보는 주변 경관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7층 높이로 제한한 도시의 낮은 건물들과 1800년 당시 완벽하게 도시계획을 세워 로타리를 8각형으로 설계한 그 선대들의 현명함과 선견지명으로 옛것을 허물지 않고 잘 보존하고 고수하여 세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그들의 지혜랄까 삶의 방식은 프랑스나 이태리나 독일이나 다 공통점인 것 같다.

 유일하게 파리에서 2밤을 한 호텔에서 머무는 밤은 그렇게 세느강에서 바라본 야경의 아름다움을 안고 깊어 갔다.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서는 늘 맑고 향기로운 고운 날 보내시고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

 

메모용지를 정리하던 중에 한가지 빠트린 것이 있어서 이렇게 파리가 아름답게 잘 보존된것은

히틀러가 파리를 폭파하라고 했을 때 17번이나 거절한 '콜 티치'란 독일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웨스트민스트 사원

 

 버킹검궁전에서 근위병교대식

                대영 박물관 앞에서 비는 내리고 카메라는 떨리고 ㅠㅠㅠ

 

 

 

 

 

 

 

 

 

 한국관에 전시된 우리나라 도자기

 

 

  꿈에 그리던 스위스의 만년설과 파리의 개선문, 그리고 로마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서유럽 여행은 가슴 떨리는 흥분으로 잠을 설치게 했다. 신종플루라는 고위험을 안고 여행지 선택에 많이 고심하다가 결정한 이번 여행은 아는 이들의 부러움을 안고 11월 20일 오전 10시반에 집을 나가서 11월 29일 오후 3시가 지나서 감동과 행복을 한아름 안고 돌아 왔다.

 

딸과 3년 전 여름휴가를 일본으로 가면서 물속에서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사서 그동안 휴가지마다 열심히 찍고, 동영상도 올리고, 내 블로그를 장식한 모든 사진들을 잘 찍었는데, 얼마 전 내가 바닥에 떨어트려 수리비가 10만원이 든다고 하여 다시 그 모델로 전자상가를 뒤져서 구입했다고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카메라를 가지고 첫 여행지인 영국 런던 타워 브리지에 가서 정말 몇 컷 안 찍었는데, 용량 부족이란 화면이 뜨면서 더 이상 사진이 찍히지를 않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딸이 보더니 제일 큰 사이즈로 되어서 그런가 보다고 그동안 찍은 몇 장을 다 지우고 제일 작은 사이즈로 해야겠다고 해서 다시 가 볼 수 없는 그곳의 사진을 안타깝지만 다 지우고 나서 다시 사진을 몇 장 안 찍었는데 또 용량 부족이라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일행 24명중에서 제일 젊은 신혼부부에게 물어 보니 카메라를 보더니 메모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이 무식함이라니... 새 카메라에는 당연히 메모리가 내장 되어 있는지 알았는데...

120장만 기본으로 찍을 수 있나 보다. 세상에 이런 청천벽력이라니...딸애의 핸드폰과 내 핸드폰사진으로 버티다 베네치아에 가서야 겨우 1기가메모리를 29유로에 샀다...ㅠㅠㅠ

그런데 하이델베르크에서는 2기가 메모리를 15유로에 샀다고 하니 보통 바가지가 아닌 것이다. 바가지가 아닌 그 가격으로 거래 된다고 하니 제 글을 보시는 분은 이점을 명심하시고 잘 준비 하시기를...

 

여행 이야기는 안하고 카메라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처음으로 여행 시작한 런던 브리지와 국회의사당 사진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도중에 회사일로 영국에서 합류한 젊은 동화씨가 사진작가처럼 멋진 카메라로 용량 부족으로 아무 사진도 못 찍고 동동 거리는 우리를 몇 장 찍어 주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을 내 메일로 보내 준다고 했는데, 로마에서 헤어지고 12월 3일경 들어 와서 내게 메일로 그 사진들을 보내주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더 지나야 그 사진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오후 3시 프랑크 푸르트행 비행기를 11시간 40분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우리나라 보다 8시간 늦은 독일로 가서 다시 영국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영국에서 첫 밤을 보내고 오전에 타워 브리지와 국회의사당,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 열린 웨스트민스터 사원, 버킹검 궁전을 관광하고 점심 식사 후 대영 박물관을 관람한 후 유로스타 고속열차를 타고 파리 북 역에 도착하여 투숙했다.

 

책에서나 사진을 통해서 많이 듣고 본 대영 박물관은 1753년 한스 슬로운경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8만점의 유물을 국가에 기증한 것이 모체가 되었다고 하나 대영제국에 해가 질 날이 없다는 그들의 화려한 과거 식민지 국가의 귀한 유물들을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전 세계의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고나 할까 특히 이집트관과 앗시리아관 그리스관들이 유명하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본 적이 있는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부터 자세히 나와 있고 유명한 이집트 람세스왕과 귀족들의 미이라도 많이 보이고 그 웅장함은 과히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준비해간 개인 무전기로 현지 가이드께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고 메모도 해 왔지만, 모두 다 소개하기도 힘들어서...더 자세한 이야기는 인터넷에 검색 해 보시면 좋을 듯....한마디로 영국 자국의 유물이라기보다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 가져다 놓은 집합장 같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데 대해서도 유럽 다른 나라에서는 말들이 많다고 한다. 남의 것을 가져 왔기 때문이라고...약 100여명의 재정지원자의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차로 이동하는 중에도 현지 가이드께서 영국 사람들의 성격과 생활상등을 자세하게 많이 이야기 해 주었다. 주택은 교회 건물보다 높으면 안 된다고 하여 그리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 하며 태어나서 배우는 첫 마디가 미안합니다.와 실례 합니다라고 할 만큼 떠들지 않고, 뛰지 않고, 검정색을 좋아 하고, 근엄과 엄숙함이 몸에 베어있고, 바른자세와 침착함, 온고지신을 중요시하고 학비와 병원비는 무료라고 한다. 성형수술비는 물론 아니지만...

 

근로기준법에도 오전과 오후 근무 중간에 차 마시는 시간을 30분씩 정해져 있을 정도로 홍차를 즐겨 마시며 레몬이나 따끈한 우유를 부어서 마시기도 한다고 한다. 면적은 우리나라의 1.1배가 되고 인구는 5880만명 이라고 한다. 홍차를 하루에 5잔 이상씩 마시는 사람이 많다고도 하며, 거리는 깨끗하고, 보이는 집들마다 작은 베란다에 꽃 화분을 내어 놓았고 타고 다니는 차는 유럽에서 제일 좋은 차를 선호 한다고 한다.

 

호텔은 4성급이라고 했는데 방은 깨끗했지만 훈훈한 난방은 처음부터 되지를 않는 시스템 이라고 할까... 아무리 더 온도를 올리고 싶어도 올라가지도 않고...치약 치솔은 없었지만,미리 이야기해서 다 준비 해 갔었다. 타월이나 다른 용품은 깨끗하게 잘 제공 되었고 이튿날 아침 식사도 다양한 빵 종류와 치즈 소세지등으로 잘 나오는 편이였다.

 

날씨는 저녁에는 추웠는데 바람이 쌀쌀하지는 않았고 가을 날씨 같이 다니기 좋았다. 비가 간간이 왔다 갔다 했지만 잠시 내리다 말았다. 국회 의사당 앞에 세워진 처칠상이 인상을 쓰고 있는 이유는 더워서, 선글라스가 없어서, 요즘 정치가 맘에 안 들어서라고 해서 잠시 웃기도 했다. 버킹검궁전에 영국 깃발이 나부끼면 여왕이 안 계시고 로얄스탠다드 깃발이 펄럭이면 계신다고 한다. 영국 왕실이야기와 황태자이야기등도 많이 들려주었는데 시차 적응이 잘 안되어 졸면서 들으면서.....두서없이 영국 편은 여기서 그만....

 

제가 없는 동안도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많이 방문해 주신 고운님들께 더 알찬 글로 보답을 해 드려야 하는데...피곤하다는 핑개를 대면서 오늘은 그만..... 그리고 외국에는 신종플루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늘 고운 날 보내시고 제가 없는 동안 제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고 댓글을 남겨주신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여러 고운님들의 염려덕분에 여행 잘 하고 돌아 왔습니다 ~~꾸뻑 ~~고맙습니다~~

 

 

 

20

 

 

 

호텔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곤명의 사쿠라호텔보다는 약간 뭔가 부족한듯 했지만 아무래도 요즘 손님이 줄어든 탓인지도 모르겠다.

약간 늦게 출발하자고 해서 식당에 내려가니 음식들이 거의 떨어진 상황이였는데, 김총각한테 이미 들은바도 있어서 참고 있었더니, 종업원들이 보기에도 뭣했는지 다시 볶음밥을 볶아 내어 와서 그런데로 맛있게 먹고 기대하던 석림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차로 이동하여 원주민 복장의 여자가 운전하는 코끼리열차같은것을 타고 석림풍경구를 돌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그야말로 사람들이 북새통인것이다. 중국 전국에서 다 모여 든것같은 차와 사람들의 홍수를 보고 놀랐고

눈앞에 벌어지는 장관에 다시한번 놀랐다.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쳐보니 석림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석림은 350평방키로미터 범위의 중국 4대 자연경관중의 하나로

전형적인 카스트로 지형이라고 한다. 대석림에는 웅건한 기세의 검지봉과 자극적 스릴감 넘치는 련화봉 기이한 형상의 석봉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소석림에는 대석림같은 웅장함은 없으나 매우 수려한 풍경으로 ' 아쓰마'로 불리는 유명한 거석이 있고 야경이 멋지다고 한다

흑석림이라 불리는곳에는 가장 높은 석주 기둥이 40미터에 달하기도 하며 석봉숲을 이루어 다향한 절경을 창출한다고 한다

경내에 융기봉 샘 호수 종유동 폭포가 함께 있는 카르스트 지형중 독특한 경관을 보여 준다고 한다

쯔윈동은 들어 가는 동굴입구 돌이 영지와 구름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초입 부분은 넓고 작은 동굴들이 많고 기이한 형상이 많다고 한다.

 

이동하는 중에 김총각이 아쓰마의 전설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대충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이족마을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기간을 먹고 사는 도깨비 귀신이 나타나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고 힘이 쎈 남자들은 그 도깨비 귀신을 잡으러 나섯지만 모두 실패하고 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 그 마을에 제일 예쁘고 재간이 많은 아쓰마가 그 귀신을 찾아 가겠다고 했는데, 힘이 쎄고 무예가 출중한 남자들도 잡지 못했는데

여자가 가서 되겠냐고 허락해 줄리가 없다는것을 알고, 몰래 그 귀신을 찾아 나섰는데, 막상 귀신과 마주치게되자 너무 무서워 도망을

치게 되었는데, 마을과 떨어진  다른 곳으로 귀신을 유인해서,  온 밤을 �아 다니다, 벼랑끝에 다달았는데 벼랑에서 뛰어 내릴 지언정

 

귀신에게는 잡히지 않겠다고 뛰어 내리려 할 때, 멀리서 수닭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는 것이다. 수닭이 울면 날이 밝아 오고 있다는 것이고, 이족여인들의 전통 복장에 모자를 쓰고 있는데, 모자 장식이 꼭 닭벼슬처럼 보여서 귀신은 멀리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마을 추장은 아쓰마를 표창하고  그때부터 이족들은 여성을 존중하고 아쓰마를 영웅처럼 받들게 되었는데 그때 아쓰마는 아헤라는

 

무예가  출중한 남자 영웅과 좋아 하는  사이엿고 둘은 결혼을 했는데, 아바이란 노예주인 흑이족 남자가  아쓰마를 탐내어 아헤를

죽였다는 것이고 아쓰마는 죽은 아혜를 그리다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이족들은 지금까지도 여자들의 극 존칭으로 아쓰마란 말을 쓴다고 하는데, 무엇을 사라고 권유할때도 아쓰마 아쓰마 하는데 그말은 아줌마란 뜻이 아니고 아가씨란 뜻이라고 한다.

 

김총각은 대석림 소석림 외석림 지하석림으로 구분이 된다고 한다.아직 개발중인 석림도 멀리 보이기도 했다

좁은 돌계단위에 정자가 있는데 그곳을 올라 가기 위해서, 구름떼처럼 몰려든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숨 막힐 정도였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정자위에서 멀리 눈길주는곳마다, 석봉들은 꽃이 되고, 양떼가 되고, 그리운 얼굴들로 피어 오르는듯했다.

 

정말 멋진곳이다고 저마다의 가슴에 탄성들을 품고는 밀려오는, 사람들때문에 급히 발길을 돌려야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다음 코스에 밀려 정자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인터넷에 곤명이라고 치면 나타나는 석림이란 한자가 새겨진 그 석주앞 역시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어, 제대로 사진조차 찍지 못할 지경이엿고, 자기 사진에 남의 얼굴이 안나타나게 찍기 힘들 정도였다.

 

다음 아쓰마의 망부석앞에도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가까이 근접하기 힘들 정도 였지만, 그래도 그 난리법석 돗대기 시장같은 곳을 용감히 뚫고 들어가서 한컷을 했는데, 아쓰마가 아헤를 그리며 꽃을 지게에 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신라 충신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다 돌이 된 망부석이 있는 치술령이란 산이 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석림의 기기묘묘한 바위군상들을 뒤로 하고 돌아 오는 발길에, 눈길에, 맘자락에, 희고 검은 형형색색의 돌꽃들이 눈앞에 밟혀 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게 잡고 있다.

지금도 눈 앞에 펼쳐지는 석림의 석봉들이 뉴질랜드 여행에서 돌아 왓을때 한동안 눈앞에 아른거리던 초원과 양떼처럼 계속 보인다.

 

이번 여행은 정말 너무 좋았다. 그렇게 거대하고 장엄한 돌들의 향연을 보았음에 너무 감격했고, 늘 그리던 친구들과의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또한 좋았고, 한가족처럼 화목하고 단란하게 보낸 일행들과의 정겨움도 빼놓을 수 없다

오후에 점심 먹으러 간 식당에서 약간 안좋은 일이 생겼지만 지금은 잘 회복되고 있음이 고맙다.

 

혹여 중국 식당에 가셔서 자리에 앉을때, 걸상을 앞으로 당길때, 의자밑으로 손을 넣지 마시기를....한친구가 그 사이가 벌어진줄 모르고

손이 들어가서 다친것이다. 그곳 현지 여행사 사장님과 여러사람들이 극진한 보살핌과 친절에 본시 명랑한 친구는 아픔을 잘 참고

치료를 마친후 저녁에 영화도 같이 보고 오는날까지 우리들이 걱정할까봐 잘 견뎌주며 웃음을 보여 줘서 너무 고맙고 고맙다

 

이제 여행도 하루 남겨두고 석림의 벅찬 감동도 접을까 합니다. 마지막날 용문산과 소수민속촌편 아직 남았네요 ...

오늘도 고운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어제 운명이란 시편에 실은 사진이 어디냐고 궁금해 하시는 님이 계셔서...그때 동영상을 올려 봅니다 고운날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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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트를 타고 운남제일풍경명산 서산용문에 갔는데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풍경이, 고산지대의 일본에서 본 삼나무인듯한 나무들과 초원, 산정상에 정자, 멀리 강인지 알았더니 호수라고 하는데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내려 보이고 능선이 원만한산을 천천히 올라가면서 밑으로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웠다

 

서산용문에 도착하여 산을 올라 가는데 중국사람들이 역시 많이 찾아 와서 무척 복잡했다

돌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돌문사이를 빠져 나갈때는 복잡해서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는데, 사진찍는다고 김총각말을 많이 놓쳤지만 중국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양을 보고 따라할 수 밖에....만지는것 만지고...

 

 

인간의 욕망이나 욕심은 나라와 민족이 틀려도 다 같은가보다. 그저 부자로 아프지 않고, 복많고, 무병장수하기를 빌고 있으니 말이다. 지옥과 천당을 다스리는 신의 모습도 보이고...생노병사 오욕칠정을 담아 놓고

속세에 찌든 인간의 욕심을 자제하고 착하게 살면 무병장수 복을 준다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듯하다

 

산을 올라갈때는 측천무후 이야기를 해 주고 내려 올때는 서태후 이야기를 김총각이 해주었는데 두여자는 중국 역사에 이름이 남겨진 여걸이랄까 악녀랄까...남자들 중심 시대에서 그 이름을 남긴 여제이긴 하나 두여자 다 심성이 악하고 나쁜짓도 많이 했지만 측천무후는 그래도 후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고 한다

 

측천무후이야기를 옮기자면 당태종이세민은 고구려와 싸워서 한쪽눈을 잃고 기가 죽어 왕후가 60살의 왕에게 16살의 무측천을시중들게 했는데 왕은 무측천에게 빠져서 헤어날 줄 몰랐는데 어느날 무측천에게 자기가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하겠는냐고 떠 보았더니 무측천이 자기는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절에가서 도를 닦으며 돌아가신 왕을 위해 열심히 불공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때는 왕이 죽으면 궁녀들도 같이 데리고 갔고 다른비들은 냉궁에 가두어 살아도 살아 있는것이 아니고 갇혀서 살다 이윽고는 죽게 되는데 당태종의 4째 아들이 미리 알려주어 그렇게 대답을 한것이라고 한다

후에 착한 왕비의 팔다리를 끊고 알콜물에 넣어두고 죽지도 못하게 고통을 주는 극악한 일을 저질럿지만

 

왕이 죽고 12살아들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다가 나중에는 아들까지 독술로 죽이고 여제가 되어 정치를 했는데 그 당시 중국을 많이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녀의 비석에는 글씨가 없다고 한다

일명 무자비라고 하는데 후세사람이 자기를 평가하라고 아무글씨도 쓰지 말라고 했다고 하니 역시 여제답다고 생각된다.

 

운남민속촌으로 이동 하는중 모서족과 이족들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그들은 죽으면 조장을 지낸다고 한다 라마교 스님이 시체를 잘라서 산에 버려두면 새들이 와서 먹는다고 한다

착한 사람이 죽으면 새들이 많이 날라 온다고 하는데 새는 하늘과 가깝고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 간다고

믿는 까닭에 그렇게 한다고 하고 옛부터 중국은 백성들이 강이 범람에 시달렸기 때문에 물을 잘 다스려야 

 

황제가 된다고 했다고 한다.전해져 내려오는 3황은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이 계신다고 하는데 아주 어릴때

친정엄마와 아버지한테서 들은 이야기 같기도 하다

5제가 있는데 염제와 황제와 신농제와 복희제라고 하며 한사람은 모르겠다고 ...

 

우리가 잘 아는 진시황때 화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문자 한자를 통일했다고 하며 중국은 땅이 넓음에도 시간이 통일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동쪽과 서쪽의 차이가 심하게 일어 난다고 한다

김총각의 이야기에 귀 기우리다 보니 운남소수민속촌에 왓는데, 거대한 나무들을 보니 앙코르와트의 나무가 생각이 났고 그 물위에 비친 풍경들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너무나 틀리는 분위기 였다.

 

여러 소수민족들의 특성을 들으면서 여기 저기 정신 없이 다니다 보니 하루해가 저물어갔다.

물을 잘 다스리는 민족,모계중심의 민족은, 딸은 창문이 있는 방을 주고 아들은 방이 없다고 한다

딸이 밤에 창문을 열어 두면 동네 총각이 그 문으로 들어와서 자고 간다는데, 이미 다른 남자가 있으면 창가에 꽃바구니를 걸어 둔다고 한다.

 

만약에 임신을 하게되면 그 할머니나 어머니가 아버지를 정해 준다고 하니,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웃고 말았는데,좋기도 하겠지만 속 시끄러울것도 같다고 ...ㅎㅎㅎ

진정한 사랑의 느낌없이 시대 배경상 그런 형태가 종족 보존에 필요해서 이루어 졌겠지만  가히 좋은 형태는 아니였기에 지금까지 내려 오지는 않을것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우리에게 그 넓은 중국의 역사를 많이 들려 주었는데 다 늘어놓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그만 접을까 합니다. 마지막날 저녁은 정말 근사한 아주 멋진 식당에 갔는데 유명한 분들이 많이 다녀 가셨다고 사진들이 많이 걸려져 있었고 음식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99881234를 외치며 건배를 들었지요.이번 여행에서 함께 하여 기쁨이 배가된 정겨운 벗들과 멋지게 사시는 노부부님 두분과 밀양에서 오신 키다리아저씨와 서로 좋은 일행이였다고 감사와 고마움을 나누며 멋진 곤명여행기를 마칠가 합니다.

 

여행은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새로운 에너지가 되는것 같습니다.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여행에서 마이너스 된것 이상으로 알뜰히 가계를 꾸려갈 각오도 넘치게 준비 되어 있을것입니다.

한동안은 벅찬 여행의 감동으로 엔돌핀 충만한 날들이 될것이라 믿으며, 제 블로그의 동영상이 추억을 되삭임 하는데 일조 할 수 있기를~~~  오늘도 건강과 행복이 가득한 멋진 하루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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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림을 보고 호텔로 돌아 와서 잠시 휴식후 저녁을 먹고, 영화관에 가서 그곳 이족출신의 장예랑이란 시의원인 그 여인이 국립무용단에 들어 갔다가 자신의 출신때문에 차별화에 분개하여 뛰쳐 나와서 혼자 연구하고 만들었다는데, 운남성 출신으로 시골에서 농사짓는 서민들 중에서 뽑아서 열심히 가르치고 갈고 닦은 솜씨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로 치면 전국예술인대회 같은데서 1등을 하여서 그 후로 아주 유명해 졌다고 한다.

 

김총각이 아주 높이 평가 하기도 하고 일행이 적게 온터라 김총각의 옵션을 뿌리치기도 그래서 다 같이 보기로 했다.많이 연습하고 훈련한듯 소수민족의 생성에서 부터 자연과 함께한 풍습이랄까 생활이 베어 나오는듯

장례의식도 가미된... 스토리 전개 같았는데.... 달 속에서 실루엣으로 보여주는 여자의 곡선은 가히 환상적이였다고나 할까....나중에는 약간 졸립기도 했는데 다들 낮에 많이 걸은 탓인지 다 졸렸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엔 운남제일풍경명산 서산 용문을 갔다가 오후에 박물관에 갔는데 서산용문은 따로 동영상을 올리기로 하고, 먼저 박물관편을 올리기로 한다.

박물관은 김총각 말로는 좋은것은 장개석이 다 대만으로 갖고 갔다는 것이고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큰 보물급은 보이지 않았다

 

2층에 자리한 텅빈 공간에는 공룡씨리즈로 채워져 있었고, 상점에 그곳의 특산품인 여러가지 보석류와

그림, 다기류 ,집에 두면 복이 들어 온다는 작은 조각품등 만물상처럼 없는것 없이 관광객을 위해서 열쇠고리라던지 향기주머니등 아기 자기한 것들이 많이 비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기서 약간의 쇼핑을 했다.

 

김총각은 이동중 끝없이 중국의 역사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다 옮기지 못해서 안타깝다.

이족들의 장례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이족중에 노예주인 흑이족이 죽으면 멋진 관에 작은 구명을 뚫어서

물에 담가 둔다는 것이다. 밧줄로 묶어서...그러면 그 작은 구멍으로 물고기새끼들이 들어가서 시체를 먹고

3개월후 살이 쪄서는 다시 그 구멍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 있는데, 그때 관문을 열고 그 고기를 후손이

먹는다는 것이다.

 

조상들의 혼이 자기들 몸 속에 흐른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노예주인 흑이족은 영원히 이어져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를 물어보지 못했다.너무 끔찍한 생각에 ...ㅠㅠㅠ

이야기만 들어도 속이 울렁일 지경이다.

 

오늘은 여기 까지만....

깊어 가는 가을날 오늘은 주말인데 가족들이랑 가까운 근교 산에라도 가시면 좋겠지요

많이 춥다고 하네요 건강 잘 챙기시고 맑고 향기로운 고운날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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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후 곤명에서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구향동굴로 향했다,표를 끊고  엘리 베이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니 황토물이 흘러가는 계곡이 나타났다. 잠시 팍상한 폭포를 갈 때 계곡을 힘겹게 두사람이 카누에 두명을 태우고  밀면서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고 다들 말한다. 우리일행 모두 같이 구명조끼를 입고 배를 타고 계곡 깊숙이 들어 갔다가 돌아 나와서 동굴로 이동했다.

 우리나라의 삼척에 있는 환선굴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더 넓고 깊고 길고 웅장하다고 할까....

 

동굴속에 폭포가 떨어지고 큰 강이 흘러 가는것같다. 계단도 오르고 다리도 건너며, 조명을 받아 더욱더 기괴해 보이는 바위들을 보면서

한시간 넘게 걸어 들어가니 거대한 소용돌이형 지형으로 기둥이 없는 학교운동장처럼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한켠에 전시관도 현대식으로 잘 지어져 있다.1999년 세계 최초로 동굴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전시관 속에는 각종 암석류와 인간이 진화되어온 모습들을 보여주는 그림과,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원시인의 모습이 실물처럼 서 있다

 

사진 찍는 기술이 부족하여 동굴사진을 잘 못찍어서 정말 안타깝다. 미리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누구를 탓하리요....연신 카메라셔트를

눌르긴 했는데...온통 시커멓게 보이지 않는 사진이 너무나 많다.오호 통재라...ㅠㅠㅠ

동굴속이긴 해도 또 이따금씩 하늘도 보이고 원체 긴 거리를 이동하다 보니...굴을 몇군데 거쳐서 밖으로 나오니 처음 들어 왓던 곳에서

 

많이 떨어진 거리인가보다 리프트를 타고 이동했으니 말이다. 산을 올라 가는데 경치가 아름답다. 곤명이란 도시 자체가 해발 1900미터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서 또 산으로 올라 갔다가 내려 갔다가...그래서 들어 갈 때 미리 물을 한병 주는데 뚜껑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그 물병을 발명한 사람은 히트를 쳤다고 김총각이 말했다. 동굴을 돌다가 숨이 막혀 오거나 하면 꼭 물을 마셔야 한다고... 

걸어 나오는길에 과일을 파는 상점들이 많이 보인다. 김총각이 석류를 사 주었는데 옥수수랑 군고구마도 팔고 다른 열대과일들도 보인다

 

돌아 오는길에 석림풍경구 옆을 슬쩍 지나 오는데 멀리서 보아도 그 대단한 바위군상들의 모습에 저절로 탄성이 나올지경인데, 김총각은 이것은 그냥 맛보기라면서 내일 이번 여행의 진수를 보여 주겠다고 한다.

호텔로 돌아 와서 호텔내 중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먹고, 호텔방에서 발마사지를 받고 편하게  기분좋게 잘 잤다.

 

내일은 석림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냥 맘으로 생각만하여도 흐뭇한 친구들과의 여행이니만치 모든것이 다 좋았고, 맛있었고,  재밋었다.그리고 먹을거리도 푸짐하게 준비해가서 차로 이동하는 동안도 계속 군것질 거리를 달고 있었으니 ㅎㅎㅎ

아무래도 한국에 돌아 갈땐 모두 2킬로쯤 체중이 불어 있을것이라고 생각된다.

 

살면서 좋아 하는 친구들과 이렇게 같이 잠자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같이 멋진곳을 보고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사랑하는 벗이 있음으로 우리 정녕 행복한거라고, 언제나 지금처럼 고운 모습 건강하게 잘 간직하기를 ~~~ 

늘 풍성하고 향기로운 고운날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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