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온 편지

 

 

늘상 바람처럼 낯선 곳으로만 치닫고 싶어 했던 젊은 날의 열정도 식은 지 오래건만

계절이 바뀔 때 쯤 이면 한 번씩 도지곤 한다

올 가을 무슨 축복인양 몇 번씩이나 이 숨 가쁜 거리를 벗어나 가을 속에 안길 수 있어 행복하다.

 

언제나 방황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 상태가 차라리 편안했고 고독에 절여져 더 이상 고독할 수 없는

극의 끝에 서 있다고 착각 하면서 그것을 또 멋 인양 얼마나 척 하면서 살아 왔던가...

 내 마음대로 될 수 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시도했던 운명을 향한 내 몸부림도

자위의 웃음으로 껴안을 수 있을 만치 세월이 흘렀나보다.

 

언제 철 더냐고 그렇게 나무라던 따스한 그 사람도 내 곁을 떠나가고 하나 둘 늘어가는 흰머리처럼

내 추억의 필름들도 하얗게 마모되어 갈 때 난 그 모든 것을 다시 망각 속에서 미이라 처럼 불러 모우리라.

언제였던가? 11월의 늦가을 저물녁 순자와 둘이서 찾아간 표충사 요사 체의 한없이 처량하고 적막했던 그 밤

 밤새 뒤척이던  가랑잎소리에 가슴이 시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잊혀진 여인이라도 된 듯이 괜시리 울고 싶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서럽게 운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호주로 이민 가서  4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던 순자가 표충사 그 밤이 생각난다고 이 가을에 편지가 왔다

언제 또 다시 둘이서 그날 그 밤처럼 보낼 수 있겠느냐고  그동안 이민생활의 애환을 적어 보내 왔다

머나먼 타국에서 생각하는 젊은 날의 가을은 눈물 나도록 그리운가보다

 동갑이면서도 언제나 언니같이 보살펴준 순자와의 기억은 한없이 따스하다

내 시집갈 때 연말 결산 때문에 바쁜 나를 대신하여 1주일 동안이나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지내며 다 챙겨주고

예단에 보낼 음식까지 직접 만들어 주면서 그 추운 겨울에 연탄가스 까지 취해 가면서 나을 위해 얼마나 고생 했던가!

 

정작 시집가는 나는 회사에 출근하고 마치 본인이 시집가듯이 온갖 준비를 다 해 주었었지.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우리 집에 와서 실습한다고 도려 놀렸었는데 솜씨가 워낙 좋아서 양재사 자격증도 따서 내 치마며 바지도 만들어 주고

또 사진에 취미가 있어서 내가 모델 노릇도 많이 했었지. 지금 생각하니  순자는 정말 진취적이고 세련된 앞서가는 여자였다.

 그 당시 운전 면허증까지 땄으니 말이다. 뜨개질도 또 얼마나 잘 했는지 그때 짜 준 주홍색 큰 순모 숄은 아직까지도

애용하고 있고 두 아이 키울 때 찬바람 불 때면 덮어씌우고 다니면서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했는지...

 

내 생일날에 맞추어 손가락까지 다쳐가며 짜준 여름핸드백하며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뿐이랴 무엇보다 고마운 건 알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집 살 때 돈이 나올 때가 늦어질 거 같아 조금 모자란다고

지나가는 소리로 했더니 진영에서 대구까지 덜커덩거리는 길을 5시간이나 달려와 20여 년 전에 꽤 돈을 선뜻 내놓던

너를 보고 우리 부모님께서 얼마나 놀라고 고마워했었는지.....

 

언젠가 여름 휴가 때 돌핀호로 해금강에 가서 저지른 해프닝 해적선에 잘못 탄 추억을 어이 잊을 수 있겠니

너도 그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했었지. 그때 그 사람들 다 건강하게 잘 사시겠지...

늘상 신세만 진 기억에 고기값보다 야채 값이 비싸다 하여 김을 좀 부쳐 보냈더니 마음은 있어도 막상 그렇게 보내기가

쉽지 않다면서 언니 네와 교회 목사님이랑 나누어 먹었는데 그곳에선 휴일 날은 종일 목사관에서 보낸다는 것이다.

 일요일 점심때 내가 보내준 김을 목사관에서 모두 같이 먹으면서 감사기도를 올렸다는 편지를 받고 작은 일로

너무 큰 은혜를 받은 것 같아 송구스러웠다.

 

내가 이 가을 이렇게 큰 기쁨에 잠긴 것은 그 감사기도 때문만이 아니고 네가 그곳 대학에서 회계사 공부를 시작하여

40과목 중 8과목을 통과 했었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장하구나 친구여! 말도 서툴고 40이 넘은 작은 체구의 머리 희끗한 한국의 여인이 덩치 큰 그들 속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회계사애 통과할 그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과연 너답다고 가슴이 뛴다.

빛나는 너의 졸업식에 꼭 참석하도록 할께 너를 생각하며 느슨한 내 삶의 고리를 단단히 채우고

이 가을 감상에서 깨어나 나름대로 새로운 시작을 시도해 봐야겠다.

먼 산이 내 좋아하는 갈색으로 꿈꾸고 앉았는데 난 너로 하여 따뜻한 겨울을 맞을 것 같구나!

 

 

***1992년도에 쓴 글인데  그 후 작년2006년 6월에 호주에 가서 친구와 상봉한 글은

이미 시드니에서 순자와 보낸 밤에 실려 있다.

친구는 몸이 아파서 학업을 중도에 쉬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고 가끔씩 통화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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