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낡은 구두와 두 자녀의 아름다운 효심|
 
      아빠의 낡은 구두와 두 자녀의 아름다운 효심 아빠의 낡은 구두 버려도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낡고 찌그러진 아빠의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내가 이런 비참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실직한 이후 부터였습니다. 아빠의 실직 이유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아빠는 그 일로 몹시 괴로워 하셨습니다. 주무 시다가도 몸을 부르르 떠시는 모습은 마치 활동 사진처럼 내 기억속에 생생합니다. 실직 하신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아빠는 어느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전 회사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였는지라 아빠 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었나 봅니다. 입사하신지 1개월이 조금 지나 아빠는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던 출장근무를 자원하셨고 그후 늘 출장만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3일 4일이었던 출장이 조금 지나서는 1주일 2주일씩으로 늘어났고, 요즘에는 1달에 한 번씩 겨우 집에 들어오십니다.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의 구두는 검정색인지 황토색인지 분간 하기가 어려울 정도 였습니다. 아빠는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매일을 걸어 다니심이 분명 했습니다. 그나마 그 구두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본래 낡았던 구두가 어느 샌가 뒷굽도 다 닳고, 앞으로는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구두를 몇 번이나 수선 했지만 끝내 더 이상 수선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아빠는 가장 값싼 운동화를 사 신으셨습니다. 우리 남매를 키우시느라 구두를 살 형편이 되지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운동화 역시 한번 출장을 다녀오시자 금방 낡은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그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아빠 생신 때에는 반드시 구두를 선물해 드리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용돈을 따로 받아 모을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학교 오갈때 버스 타는 대신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금새 2000원이 모였습니다. 몸은 피곤 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수북이 쌓인 은행잎들을 밟으며 중앙청 앞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중, 저 앞에 웬 키 작은 남학생 한 명이 낙엽을 터벅터벅 밟으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로 중학교 1학년인 남동생 이었습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동생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너 왜 자꾸 누나 말 안 듣니? 넌 아직 어려서 걸어 다니면 피곤해서 성적 떨어지니까 반드시 버스 타고 다니라고 했잖니?" 동생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 난 아빠 구두 값을 어떻게 모으란 말이야?" 나는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누나가 다 모을 테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라고 누나가 몇 번이나 말했니?" 갑자기 동생이 표정을 바꾸며 물었습니다. "누나, 누난 얼마 모았어?" 7500원이란 나의 대답을 들은 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모은 거랑 합치면 웬만한 구두 살 수 있겠다. 누나 나 그 동안 2000원 모았어. 나 잘했지?" 나는 동생이 너무 대견스러워 하마터면 대로변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그 다음 토요일 동생과 나는 동대문 시장에서 만원짜리 구두를 샀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다음 며칠 남지 않은 아빠의 생신일을 기다렸습니다. 아빠가 그날은 꼭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마침내 아빠의 생신일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먼저 온 동생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너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아빠가 오늘 못 오신대. 그러니깐 구두를 드릴 수도 없잖아."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 낡아빠진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지금도 어느 도시, 길 웨엔가를 걷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자 어느새 내 눈에서도 이슬이 맺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쉬움의 눈물이었을 뿐 더이상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빠께 드릴 새 구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펌글-

       

       

       해바라기님이 보내온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게 된다. 우리도 어렸을 때 그렇게 힘든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한 학급의 반 이상이 점심 도시락을 사오지 않았다. 모두 점심 한끼는 건너뛰기 일수였다. 중학교 가서도 용돈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걸어 다녔고 그 차비를 아껴서 엄마 생일 선물이라도 하나 해 드리려고 애쓰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때도 그 먼길을 걸어 다녔다. 내 친구 선호와 같이....선호가 없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였다. 선호는 잘 살고 있겠지...그 옛날 생각도 나고 ....아빠를 생각하는 남매의 애틋한 마음이 담담하게 전해져와서 한동안 마음이 울렁인다....

      그때 그시절을 생각하면서 주위에 이런 이웃이 없는지 돌아 보면서 이제는 우리나라도 모두 다 잘 사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어제는 느닺없이 눈이 또 퍼붓기 시작하여 앞산이 온통 하얗게 변해가는 모습에 가슴이 무겁다. 오늘 평생 교육 가는 날인데...

      미끄러운 길이 정말 싫어서... 지구이변이라도 생긴 것인지...눈이 정말 너무 많이 자주 내려서 눈의 그 순결한 맛이 사라진지 오래가 되었다.

       

      늘 제 블로그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고운님들께 머리 숙여서 감사의 인사를 보내면서....출근길 조심 하시고...

      늘 가내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신 맑고 향기로운 고운날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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