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

 

                                                                   소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간 산위에서

나는 그대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살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산채로 이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가족사항

조부는 공주 김씨의 金相疇이고, 부친은 金性燾, 모친은 張景淑이다. 仁姐라는 여동생이 있고,洪明熙의 딸 洪實丹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슬하에 장녀 龜生, 차녀 龜媛, 장남 俊鎬, 차남 殷鎬, 삼남 正鎬, 사남 洛鎬 등

4남 2녀를 두었지요.

 

 

소월의 연대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02년

본명은 廷湜이고 필명/아호는 素月이다.
고향(본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일명 남산동) 569번지이다.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음력으로 8월 6일) 태어나다.

북한ㆍ연변 자료에 의하면, 소월의 출생년도는 1903년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착오이다. 최근의 북한자료(리동수 지음 김재남 해제, 《북한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 연구》, 살림터, 1992, 240면)는 이를 바로잡고 있다.

 

1904년

부친이 정주ㆍ곽산간 철도를 가설하던 목도꾼들에게 몰매를 당했고, 이로 인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죽을 때까지 폐인생활을 하였다. 북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 부랑자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때 광산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모으기도 했던 조부 김상도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자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국이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되다.

이 때를 즈음하여, 유학과 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많은 민담ㆍ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 桂熙永이 숙부 應悅에게 시집옴으로써 소월은 그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다.

 

1909년

남산보통학교(일설에 의하면 사립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하여 집안은 더욱 쪼들리게 되었으나 할아버지의 훈도와 할머니ㆍ어머니의 지성어린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다.

 

1914년

연변ㆍ북한 쪽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에 <긴 숙시(熟視)>를 썼고 이것을 후에 《근대사조》(1호,1916)에 발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5년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다.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다.

이 때 소월시의 원천(源泉)이 된 한시ㆍ민요ㆍ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6년

세살 많은 홍실단(일명 丹實) 여사와 결혼하다.

연변ㆍ북한 자료에 의하면, 남산학교를 졸업한 후집에서 쉬다가 이 시기에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하여 시를 짓기 시작했고, <먼후일>을 썼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부 연변ㆍ북한 자료에 오산학교 입학 시기를 1917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소월이 15세(공식적인 나이로는 14세)에 해당되는 년도는 1916년이다

 

1919년

북한 자료에 의하면, 동급생을 선동하여 이들과 함께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잡혀가던 도중에 요행히도 몸을 피하였다고 한다.

4월에 <춘조>를 탈고하다.

 

1920년

이 시기에 <그리워>(창조 5호, 1920. 3) 등과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학생계 창간호, 1920.7)를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다.
<춘조>를 《학생계》(3호, 10)를 발표하다.

 

1922년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하다. 동급생에 나도향이 있었고 한 반 아래에 박팔양이 있었으나 특별한 교우관계를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ㆍ1운동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함박눈>(개벽 28호, 10)을 발표하다.

 

1923년

배재고보(7회)를 우수한 성적으로(총 44명중 4등) 졸업하다. 고향에 돌아와 평북 정주군 림포면 사립학교 교원이 되다. 아동교육에 종사하면서 시창작에 정진하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서정시를 창작하고, 그것들을 《개벽》 등에 발표하다. <장별리>도 이 때 지은 작품이다.

사립학교 교원생활이 창작이나 집안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 시기에 집안이 더욱 피폐해져 가다.
처가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에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다. 학자금이 제대로 조달되지도 않았고 상과에 취미도 없어 괴로운 학창생활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10월경 귀국하다.

이즈음에 서울생활을 하게 되고 나도향 등과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의 서울생활의 느낌을 시로 읊은 것이 <서울밤>과 <不稱錘秤> 등이 아닐까 추측된다.

 

1924년

김동인 김찬영 주요한 김억 전영택 김유방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가담하여 서울에 체류하였으나, 곧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방현)에서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 지국일을 맡아보며 소일하다.

그러나 《東亞日報社史 1》의 기록에 의하면 소월이 동아일보지국장 일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26년 8월부터이고, 그만둔 시기는 927년 3월이다.

 

1925년

유일한 시론 <詩魂>(《개벽》 59호, 5)을 발표하고, 이해 말에 《진달내》(12)을 매문사에서 상재하다. 1934년6월 사남 낙호가 출생하다.

12월 23일(일설에 의하면 24일)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 자택에서 사망/자살하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마약 중독으로 추정된다.
《조선중앙일보》(12.30)에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씨의 돌연사망 기사가 났고, 《동아일보》(12.30)에 소월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흐릿한 소월 사진이 소개되다.

소월은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고개에 묻히다.

 

1935년

김기림 김동인 김동환 김억 이광수 이은상 유도순 박종화 박팔양 정지용 등 문인 백여명이 서울 종로에 있는 백합원에서 소월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지다.

안서가 《조선중앙일보》(1.22-26)에 <요절한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을 쓰고, 이어 《신동아》(2)에 소월을 추모하는 <弔詩>를 발표하다. 김억이 쓴 <요절한 박행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3)>(《조선중앙일보》 1.23) 본문에 소월의 친필이 소개되다.

 

1939년

《여성》에 소월의 <박넝쿨타령> <성색> <세모감> <술과 밥> <절제> 등 유고 시편이 발굴되어 발표되다.
김억이 박문서관에서 《소월시초》를 펴내다.

소월의 묘를 서산면 왕릉산으로 이장하다. 

 

 ***다음 신지식에서 맘매김님의 글을 옮겨온것이다.다음의 바다가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중학교에 입학하여 수업 첫날 국어 시간에, 임시 담임으로 우리교실에 들어 오신 교감선생님께서 절절히 읊어주시던 이 초혼시를

들었을때, 온몸에 소름이 돋듯 전율이 흘렀던 기억이 지금도 새삼 느껴진다.

그 나이에 사랑에 대해서 무얼 안다고... 초등학교 4학년때 안네의 일생을 읽고부터 세계명작을 봣던 터이라 나는 참 무척 조숙했는지도 모르겠지만,일찌기 어린날부터 그리움에 대한 남다른 감성은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월의 일생을 보면 알겠지만, 일제의 침략 아래서 가정의 몰락과 아버지의 정신병 등으로 감수성 많은 소월의 그 심정을 조금은 헤아릴것도 같지만, 그렇게 자살로 세상을 마감하기 까지의 그의 고뇌와 절망, 고독과 아픔을 어이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만의 남다른 섬세함과 상처받은 영혼은 그 누구도 다 이해하지는 못할것이다.

 

우리곁을 너무 빨리 떠나간 천재시인의 가슴 서늘한 울림과, 절절한 한과, 피맺힌 절규만을, 우리는 조금 헤아릴뿐.... 

그래서 그의 시는 언제나 우리 가슴에 애절한 사무침을 안겨 주는것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앞에서 피 토하듯 써내려간 초혼의 절절함에 잠시 가슴 떨어본다.

 

초혼 시는 슬퍼도 오늘이 벌서 주말이다. 구정 연휴로 한주가 정말 빨리 지나가는듯하다.

흐린 날씨가 영하 1도라지만  싸늘하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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